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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브라운 Jun 29. 2024

아빠의 세 번째 수술


3주 전 아빠가 심장 수술을 받으셨다.

몇 년 전 두 번째 부정맥 수술을 받으시고 벌써 세 번째 심장 관련 수술이었다.


수술 며칠 전에야 알게 된 아빠의 소식. 한창 회사에서 일하는 도중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를 통해 알게 됐는데 아들들 걱정시키기 싫어서 말씀을 안 했다 하시는 엄마의 얘기에 난 오히려 화가 더 나 말씀드렸다.


"아니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어떻게 수술받으시는 걸 얘기도 안 할라 하셨어요. 나중에 알게 되면 저희는 어떻겠어요?"


엄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들로서 이런 얘길 들으면 참 서운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자식들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이 이런 수술을 받으시면서 어떻게 우리에게 얘길 안 하려고 하셨을까.

엄마에게 바로 아빠를 바꿔달라 했고 아빠에게도 말씀드렸다.


"아빠, 아들이 셋이나 되는데 어떻게 말씀도 안 하시고 수술받으려고 하셨어요. 그러시면 진짜 서운해요. 다음부터는 무슨 일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네?"


내 얘기에 아빠는 그러리라고,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아빠의 심장


아빠가 처음 심장 수술을 받으신 건 2010년이었다. 어느 날 부정맥 진단을 받으셨다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 하셔서 우리 삼 형제를 깜짝 놀라게 하셨던 아빠. 그때까지 우리 가족 중에서 수술을 받아본 적은 없었기에 '6시간 정도의 수술'이라는 말이 주는 걱정과 두려움은 꽤크게 다가왔었다.


아직도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향하던 아빠의 모습이 생생하다. 내 생애 처음 아빠를 보면서 느꼈던 안쓰러움이라는 감정. 언제나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아빠가 병원 침대에 누워 몸을 떠시며 실려가는 모습은 어느새 아빠도 나이를 드셨음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했다.


그리고 5년 전인가 같은 수술을 한 번 더 받으셨는데 이번 수술은 부정맥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심장박동평균보다 많이 느려서 인공심장박동기를 삽입해 보통 수준으로 맞춰주는 수술이라 했다. 처음 듣고는 깜짝 놀랐다. 인공심장박동기를 삽입한다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다행히 많이들 받는 수술이었고 시간도 1~2시간 정도로 비교적 짧은 편이었다. 마취도 전신마취가 아니라 내시경 검사 때 사용하는 수면마취로 한다 했다. 생각보다 위험한 수술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아빠의 나이가 이제 칠십 후반을 향하고 있기에 걱정을 떨칠 순 없었다.


세 번째 수술


아빠는 수술 하루 전 입원을 하고 다음 날 오후 1시쯤 수술을 받는다 하셨다. 이상이 없으면 다음 날 퇴원.

마침 둘째 형이 아빠 입원날 회사를 쉰다고 해서 그날은 둘째 형이 함께 가기로 했고 퇴원하시는 날은 내가 기로 했다. 입원 날 오후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요즘도 입원환자는 보호자 1인 외에는 면회가 안된다고 하셨다. 함께 갔던 작은형도 입원실에 들어갈 수 없어 그냥 올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의 여파가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었다.


아빠의 목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컨디션은 좀 어떠시냐는 내 물음에 아빠는 괜찮다 하셨고 난 너무 걱정 마시라고, 많이들 받고 금방 끝나는 수술이니 한 잠 주무시면 다 끝나있을 거라 말씀드렸다. 내 얘기에 아빠는 또 고맙다 말씀하셨다. 언젠가부터 부쩍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 아빠.


수술 당일, 오후까지 회사일이 너무 바빠 엄마와 통화를 하지 못했는데 아내가 아빠의 소식을 카톡으로 전해왔다. 11시쯤 수술실에 들어가셔서 1시쯤 나오셨다고. 그리고 수술은 잘 됐으니 걱정 말라고.


오후 늦게 회사일이 좀 정리되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수술 잘됐다 하시며 별일 없으면 내일 퇴원할 건데 교회 장로님이 오셔서 모셔다 드리기로 했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 말씀하셨다.


"엄마, 그래도 아들이 가야죠!"


내 얘기에 엄마는 아니라고, 장로님이 잘 도와주시기로 했으니 안와도 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엄마 성격에 이런 걸 다른 분께 먼저 부탁하진 못하셨을 텐데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럼 난 퇴근하면서 집에 들르겠다 말씀드렸다.


퇴원


다음 날 아빠는 오전 11시쯤 퇴원을 해서 교회 장로님 부부의 도움으로 편하게 집으로 오셨다 했다. 난 퇴근길에 본가에 들렀고 그제야 수술을 받고 나오신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간단한 수술이라곤 하지만 며칠 병원생활을 하고 나오신 아빠의 모습은 처음 수술을 받으셨을 때만큼 안쓰러움으로 다가왔다. 얼굴은 조금 부은 것 같았고 왼쪽 가슴팍에 거즈를 붙이고 계셨다. 인공심장박동기가 들어가 있는 바로 그곳. 아빠는 수술 부위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기에 당분간 샤워는 못하고 통증으로 왼팔을 잘 움직일 수가 없어 불편하다 하셨다. 그런 아빠 옆에서 엄마가 말씀하셨다.


"머리는 내가 감겨준당께. 편안하게 모시겠다고."

 순간, 평소엔 티격태격하시지만 아빠 곁에 엄마가 계신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수술은 됐지만 10년 후에 다시 한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인공심장박동기에 배터리가 들어가 있는데 그게 10년 정도 지나면 갈아한다는 이유였다. 그때면 아빠의 나이가 여든 중반인데 아무리 수면마취라지만 괜찮으실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아버지


어렸을 적 아빠는 엄하셨고 보수적이라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아빠와 대화를 한 기억이 거의 없다. 물론 아빠는 회사, 난 학교와 학원으로 집에서 마주칠 시간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어쩌다 함께 있는 시간에도 별 다른 대화가 없었다. 그저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이 시간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는데 그러다 아빠가 처음 심장 수술을 받으시던 날, 이 날을 계기로 아빠와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퇴근길 아빠 병실에 들러 침대에서 마주 보고 앉아 나눴던 이런저런 얘기들. 한 20~30분쯤 이어졌던 이 대화는 적어도 내겐 사춘기 시절부터 직장인이 될 때까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던 부자간 마음의 벽을 허물수 있는 계기가 됐다.


아마도 아빠는 내가 그렇게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으리라. 먼저 다가오시기엔 그간 내가 밀어낸 시간이 너무나 길었으니까.


지금은 본가에 가면 아빠와 더 많은 얘기를 하려 한다. 나도 나일 먹어보니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새삼 아빠가 대단하다 느껴진다. 가족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며 살아오신 아버지. 아빠도 종종 힘들고 울고 싶은 날 있었을 텐데 한 번도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신 적이 없다. 도대체 가족들 몰래 어디서 삶의 힘듦을, 눈물을 쏟아내셨을까.  


그 옛날, 넘어질까 혹 당신의 손을 놓지는 않을까 어린 내 손을 꼭 잡고 걸으셨을 아버지. 이젠 내가 그럴 시간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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