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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Dec 29. 2021

섭섭해서 그랬어

2년 동안 뵙지 못한 부모님 얼굴

프랑스 남편을 만나 이렇게 한국과 동떨어진 세계에 살게 되리라고 생각 못했다. 

그리고 2016년 우리가 결혼을 할 때만 해도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온 세계에 번져 하늘 길이 이렇게 오랫동안 막힐 줄도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이럴 때는 한국 남자여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하다못해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도 있는데 왜 내 짝은 프랑스에서 태어났는지 - 또 시작되는 도돌이표 물음은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머릿속만 빙빙 돈다. 


못 가지 그러면. 이렇게 오미크론 때문에 여행길이 막혔는데 어떻게 가니. 
그래서 티켓 취소했어.


11월부터 논의되었던 2022년 1월 부모님이 한국에서 프랑스로 오시는 것은 날짜를 정하고 티켓팅을 하고 이상하리 마치 착착 진행이 빨랐다. 12월 오미크론 여파로 다시 하늘길이 막히기 전까지 말이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예상했던 엄마의 말이었지만 막상 그렇게 엄마 목소리를 통해 들으니 폭풍급의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온 나라가 바이러스 통에, 나이도 드신 부모님을 오시라 하는 것은 실로 큰 부담이었다. 설사 오신다 해도 우리가 원하는 그 날짜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더욱 막막하기도 했다. 혹여 나라도 여기서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의료적 치료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한국에 비해서 모든 게 느린 유럽 땅에서 약이며 치료며 빠른 대응을 기대하기가 어렵고 더구나 여행자 보험으로 오시면 치료도 내국민에 비해 순서가 느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엄마의 구구절절한 이유를 듣는 통화 내내 짜증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2년 만에 보는 딸 오랜만에 얼굴 보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이사며 아이들 학교 이전 문제 등)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데 칼같이 끊어버리는 엄마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이유가 없었다. 엄마가 "잘 있어!"라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화 빨간 버튼을 단숨에 눌러버렸다. 

결국은 내가 또 다 해야 하는구나 - 라는 생각에 화딱지가 났다. 대체 엄마라고 있는 사람이 하나밖에 없는 딸 산후조리도 못 보러 오고 이사도 못 도와준다고 하고 어찌 이러나 싶었다. 그리고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늘 이렇게 주변에 일이 많고 하물며 늘 혼자 겪어내야 되는, 무슨 팔자 놈이 이런가 싶었다. 


한 가지 더 짜증 나는 포인트는, 매해 우리 엄마라 시어머니 생신이 비슷한 시기인데, (시어머니 생신은 1월 15일인데 엄마는 음력으로 계산하기에 시어머니 생신 전 며칠이 항상 엄마 생일임) 이번에 양력 계산을 해보니 엄마 생일이 2022년 1월 11일이었다. 엄마가 오고 나면 오랜만에 내가 생신상을 근사하게 차려드리면 되겠다 했는데 그 계획 역시 도루묵이 되었다. 결혼한 출가외인이라 늘 "남의 엄마" 생신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도 우리 엄마 생신 미역국을 직접 차려드릴 수가 없다니 참으로 통곡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번만이라도 "이번 해에는 저희 엄마 생신도 있어서 어머님 생신에 다 같이 모이는 일정을 좀 미뤘으면 해요."라고 시어머니께 분명한 이유를 댈 수 없는 것이 분통이 났다. 가족 대소사에서 내가 남편 부모님께 성의를 다 하듯이 우리 부모님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먼 거리라는 이유로 간소화되고 절차 생략이 되는 것이 정말 이젠 진저리 나게 싫었다. 


사실 엄마가 이렇게 코로나라는 천재지변 급의 역풍이 불기 전에는 늘 내가 필요할 때마다 먼 거리를 와주었다. 독일에서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밥도 못 먹고 정신 못 차릴 때에도, 독일에서 이사를 할 때에도, 첫째를 낳았을 때에도, 보모가 8월 통 휴가여서 급하게 첫째를 봐주어야 할 때에도 열일 제쳐두고 12시간을 비행기를 타며 오던 엄마였다. 도착 첫날 엄마는 비행기가 체질이라며 역력하게 피곤한 눈으로 내게 당장이라도 내일 마치 앞산이라도 다 깎을 수 있을 기세마냥 엄마를 믿으라는 든든한 얘기를 하였다. 그래, 그땐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겼고 지금은 이 시국에 내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엄마를 몰아세우는 지랄 맞은 딸이란 것쯤은 나도 잘 안다. 

복잡하게 꼬여버린 감정 속에서 나는 2주 동안 엄마에게 시위를 시작했다. 엄마 문자에도 단답으로 그리고 거의 이틀 걸러 전화하여 한 시간씩 통화하던 것은 아예 싹 끊어버렸다.  

그런 혼자만 열심히 참여하던 1인 시위는 나의 코로나 확진으로 일단락되었다. 내가 3일 동안 죽도록 아파보니, 마흔도 안된 내게 이렇게 며칠 정신도 못 차리는데 나이가 있는 엄마 아빠가 아파서는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결론 때문이었다. 내가 아프기 전에는 엄마 아빠가 12시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와줬으면, 그까짓 바이러스 따위 며칠 감기처럼 앓으면 되는 것일 텐데 생각했는데 그게 큰 오산이었다. 

엄마는 참으로 강한 사람이지만 가끔 자식 일이라면 앞뒤 분간 못할 정도로 철없이 여린 면이 있다. 오빠가 혼자라도 간다는 엄마를 겨우 말리고 달래어서 엄마가 동의한 것이라고 전해주기 전까진 몰랐다. 마음만은 늘 너의 곁에 함께 있다는 오빠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섭섭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멀리 시집온 내 탓이지 뭐 엄마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대한민국 그 터가 엄마의 생활 반경인데,  

쉽게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그 먼 거리에 시집온 내 탓인 것이다 결국엔. 


그 마음을 어찌 다 알리. 

이렇게 내 자식 낳아서 키워봐도 우리 엄마의 마음 열 길을 다 헤아릴까 말까인데, 

열일 제쳐두고서라도 딸 보러 먼 거리 오겠다는 엄마의 고집을 이렇게 어렵게 꺾게 되었던 그 사정이야 어떻게 알 수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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