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힘으로 삼시 세 끼란 단어는 구수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따뜻하고정감 있는 단어이다. 나에게 삼시 세 끼란 그렇게 따뜻한 단어이지만은 않다.
둘째가 이제 19개월에 접어들어 이유식 반 + 어른들 먹는 음식 반 이렇게 먹어서 전보다 훨씬 수월해졌지만 매끼 쫑알쫑알 배고프다고 부엌에서 다리를 물고 늘어질 때면 그 모습이 너무 귀엽지만 때론 매끼 따뜻한 밥을 차려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느낀다. 더구나 나는 직장맘이다 보니 일하고 퇴근하면 그때부터 사실 더 바쁘다. 한식 주의를 고수하는 나, 물에 빠진 닭 따위, 뼈 있는 생선 일절 먹지 않는 프랑스 남편 그리고 우리 둘 식성이 교묘하게 섞인 두 아들 - 그러다 보니 가스레인지 불 4개을 다 사용하는 일이 아주 잦다.
상을 내고 얼른 아이들을 먹이고 우리도 식사를 마치고 한 바가지 나와있는 설거지 감을 볼 때면 그래 이제 하루가 다 갔구나 실감한다.
사실 남편이 프랑스인이어서 되려 편할 때도 있다.
같이 피자를 구워 먹던 즉석식품을 자주 먹는다 해도 그 아저씨는 소위 부산말로 '망구땡'이다 (어떻게라도 허용이 된다는 의미) 그리고 아침은 난 잘 건너뛰는 편이고 남편은 간단하게 빵에 잼을 발라 커피에 혼자 차려 먹으니 사실 우리에게는 삼시 세 끼가 아닌 삼 시 두 끼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자주 안 해서 그렇지 음식 차리는 솜씨도 제법 있는 남편이라 사실 믿음이 있다.
그래도 내가엄마에게 보고 자란 게 있다 보니 그래도 아이들에게 즉석식품보다 대부분 내가 차려서 따뜻한 밥을 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자면, 우리 엄마가 가스 불 앞에서 국을 끓이고 도마 칼질 소리가 나는 그 광경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이렇게 아이들을 낳고 키우다 보니 매끼 차려내는 그 음식이 매일 얼마나 고단했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 이미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우리를 낳기 전에 지병으로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외가에 대한 기억이 내겐 없다. 자주 얼굴 보고 만나는 이모 정도?
그래서 명절 때 사촌들이 놀러 와서 실컷 놀다가 헤어질 때가 되면 하루 더 자고 가면 안되냐는 나의 투정에 "내일은 외가에 가야 돼"라는 대답은 내겐 때론 공허함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렇게 엄마는 네 형제 중 첫째 아들이던 아빠를 만나 시집살이란 걸 시작했는데 막내딸로 곱게 자란 엄마에게 친정 부모님도 이 세상에 안 계신데 그 시집살이는 참으로 고된 것이었을 거다. 한 번도 엄마가 그 기억을 되살리며 우리에게 얘기한적은 없었지만 이모를 통해 종종 듣는 얘기를 종합해보자면 그 짐작은 들어맞고도 남을 만한 것이다. 아마 엄마가 그때 기억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처럼 부엌 시설이 잘 짜인 곳도 아닌 골방 같은 찬 부엌에서 엄마는 남편을 비롯해서 장가 안 간 시동생들과 시누이 그리고 시부모님 밥을 매끼 차려야 했을 거다. 장작 어른 7명 - 밥그릇 수나 숟가락 수만 세어보아도 밥상 사이즈가 어림짐작이 간다. 그리고 1시간 넘게 차려낸 식사가 끝나고 20분 ~30분 만에 후닥닥 끝나고 나면 한아름 나와 있는 식기나 설거지를 보면 하루가 힘들었겠다 싶다. 옛날이야 그런 시집살이 흔하다 했겠지만 나였다면 그 시절 아싸리 이혼을 하고 평생 혼자 살았을지도 모른다. 일찍 시집을 간 꽃다운 나이 처자에게 매일 반복되는 삼시 세 끼는 고단함의 일상이었겠구나 생각한다.
가끔 엄마 아빠가 유럽으로 올 때면 난 유럽까지 와서도 삼시 세 끼를 차려내는 엄마가 싫다. 아빠는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여서 아침에도 밥에 뜨끈한 국이 꼭 있어야 되는데 거기다 반찬 투정도 가끔 있다. 근사한 미슐랭 레스토랑을 모시고 가도 집에 오면 아빠는 김치가 먹고 싶었다는 얘기를 한다. 그래, 나도 한식을 고수하는 프랑스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아빠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면서도 가끔 몇십 년 동안매일 삼시 세 끼를 차려내는 마누라 좀 봐주지 싶다.
코로나의 여파로 내가 식욕이 줄었다.
오늘은 따끈한 갗 한 밥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즉석식품을 데워줬다. 엄마도 살고 봐야 하지 않겠니.
프랑스에 놀러 온 동생이 내 소식을 듣고 한국 슈퍼에서 한달음에 곰탕 두팩을 쥐어주고 돌아갔다. 차려먹을 힘도 없는데 곰탕을 데워 먹으니 그냥 눈물이 난다.
이번 사태가 지나면 남편에게 닭백숙 하는 법을 꼭 특훈 시켜야겠다. 아픈 마누라 살리려면 남편이라도 손겆고 해야지 뭐. 손 빠른 내가 요리를 다 하려다 보니 지금까지 그걸 못 시킨데 못내 아쉽다.
삼시 세 끼.
나도 언젠간 가족이 도란도란 마주 앉아 먹는 식사 자리가 좀 마음 편해졌으면 좋겠다. 매끼 전쟁처럼 치러지는 노동 말고 그냥 일상에서 느끼는 소솔한 행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