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살았고 다음, (쉼표)
11월 말, 내 직속상관인 재무팀 상무가 프랑스로 출장차 왔다.
평소 출장 답지 않게 본인의 출장 동선이나 미팅 등을 공유해주시지 않아서 어째 이상하다 하던 차에, 우리 팀 개인 면담을 진행하겠다며 본인이 묵는 호텔 로비로 각자 팀원을 불렀다. 꾀죄죄한 차림에 수염도 깎지 않은 채, 멍한 눈으로 다짜고짜 회사의 영업 실적이 저조하니 경영지원팀을 통째로 해고조치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내가 권고사직 대상자라면 회사와 합의를 원만히 하고 나가겠냐는 것이 다음 질문이었다.
대상자는 나를 포함해서 총 3명.
그중 한 명은 계약직이니 실직적인 타격 대상자는 나를 포함해서 2명
자기 손으로 팀을 해체해 본 경험이 많다며 이럴 상황은 늘 감정을 제외하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것이라며 서론을 길게 깔더니 다짜고짜 회사와 합의를 하겠느냐란다.
그래서 평소답지 않게 수염도 안 깎고 납신 거구만.
해고 사유며 앞으로 회사 행방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없는 상태에서 정보만 가득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우리 팀이라 해봐야 달랑 3명인데 그 3명 날린다고 해서 회사가 바로 흑자 전환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면 우리가 전반적인 구조조정의 첫 희생자인지 그럼 앞으로 얼마나 다른 팀이 더 연관이 되는지.
질문만 많은데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니가 알 거 없다'였다.
나도 일단은 내가 최종 대상자로 선정이 되고 그 통보를 등기 우편으로 받으면 그때 합의를 할지 말지 대답하겠노라고 했다. 적잖이 당황한 듯한 상무는 합의 대상자이라고 "가정을" 하고 얼마 정도이면 회사와 합의를 하겠느냐는 다음 물음으로 넘어갔다.
회사가 왜 구조조정을 하는 것인지 다른 회사로 팔리는 것인지, 회계/재무며 관리를 담당하는 우리 부서를 첫판에서 내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납득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내가 독일 HR 담당인데 버젓이 독일 사업부는 계속 채용을 감행하면서 이 말도 안 되는 구조조정이 웬 말인가.
프랑스에서 직원을 해고하는 방식은 총 3가지.
합의종결(rupture conventionnelle), 경영상 해고(=정리해고 licenciement économique) 그리고 중대과실로 인한 해고(licenciement pour faut grave) 이렇게 3가지.
합의 종결보다는 경영상 해고가 여러 모로 직원 입장에서는 사실상 유리하다. 경영상 해고로 진행되면 1년 동안 직업훈련(Formation)에 대한 권리가 보장된다. 75% 정도의 월급이 1년 동안 지급되고 직업 교육도 무상으로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합의 종결로 받는 금액이 어느 정도 만족하는 수준이 아닌 이상은 내가 잘리도록 기다리는 것만이 답이었다.
"존버"하기.
사실 마크롱 정부 이전 올랑드 대통령 시절부터 논의되었던 노동개정안은 여러모로 기업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자리매김했다. 소위 말하는 노동 해고 절차가 간소화되었고 경영상의 수치의 저하만으로도 기업은 다소 유리하게 직원을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나라에 걸쳐 운영하는 다국적 기업의 경우 모기업이 탄탄하면 경영상의 해고가 어려웠던 것이 그 대상이 프랑스에 있는 자회사의 영업 이익의 손해만으로도 해고가 가능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마크롱 정부가 합의에 따른 해고 보상 금액 범위도 표로 도입을 해주어 근속 년수에 따라 합의금으로 받을 수 있는 Max 금액이 정해졌다. 예를 들어 10년 넘게 일해도 받을 수 있는 최대 보상 금액은 불과 10개월이 다였다. 그러나 경영상의 해고로 직원을 해고했을 경우, 해고 후 1년간 동일 업무 사람을 채용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 직원을 다른 직군/업무로의 전환을 회사가 여러 정황으로 시도했다는 점을 제시해야 하는 등 다소 까다로운 조건들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 나는 계속 버틸 힘이 남아 있는가.
부당한 이 해고 이후에 고소, 기나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법적 공방 이후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보상 금액인가 나의 자존심의 회복인가.
그래봐야 실질적 보상 금액은 3/4개월 월급이겠지.
승소한다고 내 자존심은 회복이 되지만 그들이라고 내가 한 이 개고생을 알까?
세상이 때로는 참 모질다.
마흔 인 지금, 평탄한 회사원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본다면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너무 늦었나?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이어지는 물음에는 정리 안 된 단어들만 산재하지만 구체화시키는 일은 천천히 해나가면 되고 나는 무엇이라도 해봐야겠다고 결론으로 반 이상은 내린 거 같다.
회사에서 마지막 면담 때 독일팀을 맡아줄 수 있겠냐는 솔깃한 제안은 아직도 유효하다.
솔직히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내게는 다시 회사에서 열정을 불태워 사업이 번창하는데 기여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불씨가 남아 있다.
하지만 목숨 부지의 조건은 연봉 조정.
돈의 문제를 떠나서 11월 상무와 면담 이후 2개월 간 회사에 패대겨쳐지고 남은 내게, 신뢰라는 게 남아 있긴 한 건가. 그리고 Management 가 무너진 회사에 더 목숨 부지를 한다고 한들, 그저 매달 통장에 찍히는 일정 월급이 다른 걸 꿈꿔 볼 수 있는 나를 '지금은 안전하다.' 계속 발목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안전하다로 80살까지 산다는 가정하에 내 인생 2막이 그럼 그걸로 충분한가?
남편은 내게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월급과 아이들과 적당히 시간도 보내고 매일 걱정 없이 누리는 소소한 하루가 정말 행복이라 했다. 진득하게 한 회사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는 그것도 나의 변덕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커리어에 대한 자아실현은 사실은 허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모든 게 돈을 번다는 것과 결부되는 순간 그것은 늘 쉽지 않다.
결혼 전 자유롭던 영혼이었던 내가 아니라 지금은 건사해야 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이 계획도 무작정 일수는 없다. 현실과 적당한 타협은 늘 필요하다. 새로운 도전이 비록 나중에 결실을 어떻게 맺을지 아무도 모르고, 돌아 돌아 다시 월급쟁이 인생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 내가 어떤 것이든 생각해 볼 수 있는 1년의 안식년이 더 오지 않을 인생의 기회일 수 있다.
일단 해고 통지를 받고 나면 첫 2개월은 '일독'을 빼는 기간으로 쉴 생각이다.
따뜻한 봄 햇살이 나올때, 텃밭을 가꾸고 나무도 심고 노동 위주의 2개월을 보낼거다.
그리고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아들에게 지적당하지 않으려면 프랑스어를 다시 공부해야 할테고, 책도 많이 읽을 것이다. 아이들 봄 방학때가 되면 박물관 그리고 전시회 등 부지런히 파리 시내를 다녀봐야겠다.
많은 생각 하지 말고, Just do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