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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디 Feb 23. 2021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

언제 손으로 글을 쓰고, 어떤 장점이 있나

전 원래 모든 기록을 디지털로 남기는 타입이었어요. 아이폰 메모장, 구글 킵, 에버노트, 노션 등 상황에 따라 여러 프로덕트에 다양한 글을 남겼어요. 2019년부터 우연한 계기로 여권 크기의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손으로 기록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생각보다 손으로 남기는 기록의 만족감이 커서 노트를 직접 만들기도 하면서 손 기록에 꽤 진지해졌어요. 내가 쓸 노트를 내지부터 고르고 직접 재단해서 바인딩을 하고, 그 크기에 맞는 케이스를 직접 가죽공예로 만들었어요. 2020년에는 20권 정도의 노트를 남길 정도로 노트 쓰기에 진심이 되었어요.


2020년에 남긴 21권의 노트



언제 손으로 글을 쓰고 손으로 글을 썼을 때 어떤 장점이 있는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간단하게 답변한 후에도 그 질문이 오래 마음에 남아 브런치에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하여 남겨둡니다.





구체적이지 않은 생각을 눈 앞에 펼치기에 좋아요.


머릿속에 모호하게 부유하는 생각을 붙잡고 종이에 하나씩 펼쳐놔요. 단어 하나둘씩 적어두고 단어끼리 찍-찍- 이어도 보고, 표도 그려봤다가 플로우도 그려봤다가 물음표를 30개쯤 여기저기 찍고 나면 어느새 생각이 정리가 되곤 해요.


초기 단계의 러프한 아이디어는 디지털 포맷으로 표현하기에 너무 비정형적일 때가 있어요. 폰이든 컴퓨터든 깜빡이는 커서와 키패드라는 제한적인 인터페이스로 생각을 담으려면 나의 생각을 디지털 포맷에 맞춰야 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정리된 이야기만 나오고 나머지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은 그 사이 다 새어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손으로 글을 쓸 때는 더 자유로우니까, 막연한 생각도 뒤죽박죽 꺼내 두기 좋더라고요. 종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쓰고, 동그라미를 표시하고, 그림도 그리고, 밑줄을 긋고, 추가 정보를 적어두기에 손글씨가 타이핑보다는 유리하죠. 생각을 마주하고, 마구 끄집어낸 단어와 낙서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며 구조를 쌓아가요. 디지털에 비해 꺼낼 수 있는 생각의 범위가 더 크고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어요.




강연 등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 적기 좋아요.


시험을 봐야 해서 토씨 하나 놓치면 안 되는 강의는 노트북으로 속기하는 게 좋죠.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런 수업을 들을 일은 거의 없었어요. 자기계발이나 업무적 도움이나 영감을 받기 위해 다양한 강연, 세미나, 컨퍼런스를 듣곤 했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야 하는 경우는 없었어요.


이런 곳에서 작성한 노트는 나중에 다시 볼 것 같지만 사실은 잘 안 봅니다. 이때 저에게 더 도움이 되었던 건 들으며 느낀 점이나 배울만한 점을 손으로 적어두는 거였어요. 강연에서 들은 내용을 나의 생각으로 여과하여 메모하는 거죠. 그 편이 더 강연에 집중하게 되고 내용도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강연을 손으로 필기하는 그룹이 노트북으로 필기하는 그룹보다 개념적인 시험 문제에 더 높은 성적을 보였다는 실험도 있었어요. 손으로 적다 보면 요약을 하다 보니 정보를 더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손으로 쓰는 행위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있어요.


회사에서 업무 하며 하루 종일 키보드로 이메일이든 문서든 글을 쓰다 보니,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손으로는 글을 쓸 일이 없어요. 근데 손으로 일부러 글을 쓰다 보면 그냥 쓰는 느낌 자체가 좋아요. 사각사각한 필기감이 좋아요. 손으로 쓸 때 자극되는 뇌도 다른 것 같아요. 요즘 필사를 하시는 분이 많아진 것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쓰는 행위를 둘러싼 물건들도 좋아해요. 노트, 만년필,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일력, 스탬프, 집게 등 평소에 불필요한 물건을 잘 안 사는 편이지만, 문구류는 어째서인지 자꾸 손이 가네요. 문구류를 펼쳐놓고 하나하나 감상하며 글을 쓰다 보면 만족감이 높아져요.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저도 아직 디지털로 쓰는 비율이 더 높아요. 이 글도 처음에 아이디어만 손으로 끄적거리고 어느 정도 구체화된 다음엔 맥북으로 타이핑하기 시작했어요. 남에게 보여주는 글의 최종 아웃풋은 디지털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죠. 긴 글을 손으로 쓰기에는 팔도 너무 아프고.


그래도 손으로 쓰는 글만의 매력과 만족감이 분명 있어요. 손으로 뭔가를 써 본 지 오래되었다면 손에게도 다시 한번 기회를 줘보면 어떨까요.




<작심삼십일-취향편>은 꾸준히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키트입니다. 나의 취향을 알아가는 30개의 글 주제로 매일 글을 쓸 수 있도록 구성하였어요. 2월 28일까지 텀블벅으로 펀딩 받아요! 얼마 안 남았습니다! 아래 링크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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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노트처럼 구성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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