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나누는 온라인 모임
초안클럽은 나만의 콘텐츠를 찾고자 하는 6인이 2주에 한번 온라인으로 모여, 초안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나누는 모임이다. 지난 10월부터 12월까지 5번의 발표 자리를 가졌고, 곧 2기를 앞두고 있다.
그동안 초안클럽에 대해 쓰려는 생각은 여러 차례 했지만,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그럴듯한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서, 좋았던 경험을 너무 평면적으로 남기게 될 것 같아서 등 여러 이유로 미루어 왔다. 하지만 2기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1기의 기억이 옅어지기 전에 지금만 남길 수 있는 기록을 해두어야겠다. 그래서 우선은 단순하게,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자.
작년에 한참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동안 다양한 채널로 다양한 이야기를 해왔지만,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처럼 느껴졌다. 자신만의 선명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뭘까,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계속 고민했는데 좀 막연했다.
'나만의 콘텐츠'라고 부르면 어려웠지만, 더 러프하게 '내 관심사'로 본다면, 할 이야기가 많아졌다.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는 주제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 중간 정도를 찾아보면 어떨까 했다. 그냥 쉽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떠드는 것과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정제된 콘텐츠 사이 어디쯤.
그래서 발표라는 형식을 생각했다. 관심 있는 주제로 5분 정도 짧은 발표. 매번 다른 주제여도 되고, 하나의 주제를 시리즈로 발표해도 되고, 제약은 없어도 될 것 같았다. 취미나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 일상의 소소한 생각, 나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 혹은 구상 중인 작업물.
아무리 짧은 발표라고 해도 발표의 형식을 띄면 기승전결이 생긴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야기의 순서를 고민하고, 말을 정제하는 단계를 거친다. 초안을 발표하면 그 후에 글을 써도 되고,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해도 되고, 그림을 그려도 되고, 음악을 만들어도 되고, 뭐든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이 모임의 구상은 머릿속을 몇 주간 계속 맴돌기만 했다. 누구랑 할지 정하지 못한 상태여서 누구에게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취향 메이트 루시와 대화를 하다가 루시가 발표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때 너무 떨린다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잘 못하는 것 같다고. 그때 머리 한편에 구상 중이던 이 모임이 수면 위로 쑤욱 올라왔다. 지금이야.
-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임이 있는데, 한번 들어봐.
- 응. 할래.
루시는 뭔지 듣지도 않고 우선 한다고 했다. 이렇게 무조건적인 신뢰라니. 그래도 어쨌거나 설명을 이어갔고, 루시는 언제 할까, 어떤 사람들이랑 할까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특히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우리랑 핏이 잘 맞고, 자기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니즈가 있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 정도로 정리한 것 같다. (모임을 열 때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나만의 기준이자 노하우인데, 이에 대해 따로 글을 쓰기도 했다.)
신중하게 선별했고, 리쿠르팅을 위해 모임을 설명하는 노션 페이지도 하나 열었다. 우리의 리쿠르팅은 한 사람의 거절도 없이 100% 섭외에 성공했다. 그렇게 6명이 함께하게 되었다. 기획자, 디자이너, 브랜드 마케터, 작사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모았고, 정말 기대되었고, 다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임, 잘하고 싶었다.
우리는 온라인으로 2주에 한번 토요일에 만났고, 총 5번의 발표를 했다. 10월부터 12월까지 2020년의 4Q를 함께했다.
한번 모이면 5~10분의 발표를 하고 15분 정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 피드백을 했다. 원래는 모임 시간을 1시간 반에서 2시간으로 잡았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2시간을 훌쩍 넘겼다.
발표: 5~10분, 슬라이드 10장 이내로 짧고 간략하게 초안을 발표했다. 내용은 거칠어도 괜찮고 뭐든 일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번 발표가 별로여도 5번의 기회가 있으니까 편하게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제는 최근 나의 관심사나 구상 중인 콘텐츠의 초안으로. 각자 정말 다른 이야기를 가져와서 듣는 재미가 있었다.
피드백: 15분 정도 발표자 외의 사람들이 돌아가며 피드백을 한 마디씩 했다. 궁금한 점, 좋았던 점, 공감하는 점, 기대되는 점, 보완 아이디어, 참고할만한 레퍼런스 등을 이야기해주었다. 지적과 평가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 초반부터 정한 룰이었다.
초안클럽에서 공유했던 내용들은 초안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결과물로 나왔다.
키미님의 책: <오늘부터 나는 브랜드가 되기로 했다>
키미님의 책이 출간되었다. 키미님은 초안클럽에 참여했던 단계에 이미 어느 정도 글을 써둔 상태였는데, 초안클럽에서 목차를 공유하고, 초고를 공유하며 조금씩 방향을 다듬어 나갔다. 매번 조금 더 공감 가는 내용으로 바뀌는 내용을 보며 책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멤버들의 의견이 책에 반영이 되기도 하고, 초안클럽 이야기가 책에 소개되기도 하면서 다들 책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졌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8897041
림코님의 밑미 리추얼: 작사가와 함께하는 <음악 듣기 x 감정 글쓰기>
림코님은 밑미에서 리추얼 메이커로 처음 참여하게 되었을 때, 리추얼의 기획을 초안클럽에 공유했다. 기획부터 실행 단계까지 각 단계에서 고민이 되는 부분들을 나누었다. 림코님은 리추얼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그 후로도 계속 프로그램을 이어가고 있다. 6월에 새로운 리추얼이 오픈하고 19일부터 신청할 수 있다.
https://nicetomeetme.kr/ritual/?idx=97
초이님의 2021년 달력: 일상을 채워줄 12가지 방법
초이님은 귀여운 그림을 그리는 부계정을 만들었던 초기 단계에 초안클럽을 참여했다. 초안클럽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공유하며 그림 스타일과 계정의 컨셉을 점차 자리 잡았고, 연말에는 달력을 만들어 판매까지 하는 놀라운 실행력을 보였다. 인스타그램 광고도 해보고 크라우드 펀딩도 해보면서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https://brunch.co.kr/@geniejini/113
흔디의 초안노트
나는 초안노트를 기획했다. 원래 수작업으로 실제본 노트 바인딩을 종종 취미로 해왔는데, 초안클럽을 하면서 초안을 기록하는 노트를 만들어서 주변에 나누어 주고 그걸로 나중에 전시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안클럽이 끝나고 뒷풀이 때 멤버들과 다 같이 노트를 만들기도 했다.
뭐 다 성공적이었냐고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초안에서 그친 발표도 많았고, 나도 처음에 이것저것 가지고 나왔다가 마무리를 초안노트로 했을 뿐이다. 그리고 초안노트는 다 같이 참여했던 거라 나만의 콘텐츠라고 보기도 좀 어렵고. 그 후로 규모를 키우거나 디벨롭하지 못했다.
나의 초안에 만족하느냐 묻는다면 좀 더 잘해도 됐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상관없다. 애초에 무언가 꼭 성공적으로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조금 더 알아가는 힌트를 얻는 정도면 되었다. 초안을 발표하며 나의 관심사, 취향, 일, 요즘 보는 콘텐츠 등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
발표의 재발견
발표 형식으로 설명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되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머릿속에만 있을 때와 사람들 앞에 꺼낼 때 정말 달라진다는 점도 배웠다. 머릿속에서는 그럴듯했던 이야기가 막상 꺼내놓으면 빈약하거나 단편적인 경우가 있었고,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피드백을 통한 성장과 연대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머릿속에 있는 콘텐츠 기획을 종종 이야기해줄 때가 있긴 했지만, 자세한 피드백을 얻기는 어려웠다. 재밌다~ 정도의 반응을 준다. 근데 초안클럽을 함께 하며 구체적이고 도움이 되고 영감을 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모두가 진심을 다해 의견을 나누었다. 어디에서도 얻지 못할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 같다.
피드백을 잘하고 잘 받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되었다. 초반에 리쿠르팅을 위한 모임 설명 링크를 보냈을 때 다들 가장 공감하고 좋아했던 내용은 '지적과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돌아보니 발표만큼이나 피드백이 우리 모임의 핵심이었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기반으로 피드백하기.
모임 자체가 콘텐츠
나만의 콘텐츠를 찾고 싶어서 시작한 모임이었는데, 이 모임 자체가 콘텐츠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다양한 미디어에 소개되었다. 초안클럽 멤버 키미님의 책을 통해서, 그리고 디렉토리 매거진 인터뷰를 통해서 초안클럽을 몇 번 소개했다. 그리고 손현님의 밀레니얼톡 칼럼에도 "격조한 시대의 격주 모임"으로 초안클럽이 소개되었다.
오늘 밤부터 2기 모임을 한다. 이번에도 5번의 발표를 하기로 했고 별 탈이 없다면 7월에 끝날 것 같다. 얼마 전에 출산하신 양수님은 한텀 쉬기로 했고 나머지 5명의 멤버가 이어간다.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할까? 같은 멤버로 3기를 또 할까? 다른 사람들을 받을까? 주제별로 다양하게 배리에이션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도 나왔고, 아주 거대하게 모두를 끌어들여서 온 세상 사람들이 초안클럽을 경험하게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고, 각 멤버들이 다단계처럼 한 명씩만 더 소개해와서 그룹을 나누는 방법도 논의했다.
초안클럽을 운영해보니 한 명 한 명의 맨파워가 이 그룹을 지탱한다. 각자 발표하는 내용에서 주는 영감이 있고, 각자가 주는 피드백의 결이 다르고, 매번 의미 있게 다가왔다. 사람이 늘어나고 모임이 나뉘면 지금의 느낌과 경험을 지속할 수 있을까. 친해지고 싶고 궁금하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계속될까. 그래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이대로도 좋다.
처음 이 모임을 만들었던 목적이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 경우엔 아직 만족스러운 콘텐츠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나만의 선명한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고, 우선은 거기에 집중하고 싶다. 다음 스텝은 2기가 끝난 다음에 멤버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할 것 같다. 우선은 2기를 잘 진행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