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서 1번 뜻만 외우면 안 되는 이유
오랜만에 외교통역을 다녀왔다. 사실 외교통역은 정부부처에서 근무하거나 외교 분야 통역을 많이 해본 경력자가 아닌 이상 기회가 많지는 않다. 그런데 이번에 감사하게도 한 기업에서 모 국가 수장 방한 계기에 진행되는 회담 시 통역이 필요하다며 의뢰를 주셨다. (정부가 아닌 기업 측의 의뢰를 받은 거라 엄밀이 따지면 외교통역이 아닐 수도 있지만 해당 기업이 한국을 대표한다고 보면 외교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회담은 고객사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방한 중인 모 국가 수장이 배석하는 자리였다. 길어야 한 시간 정도 진행 예정이라 대단히 기술적이거나 민감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을 것 같다는 고객사 담당자의 안내가 있었고 담당자는 회사소개서와 회담에 배석 예정인 분들의 이력서를 사전에 전달 주셨다. 보내주신 자료는 물론이고 해당 국가 관련해서 최신 뉴스와 주요 산업 등의 내용을 찾아보며 공부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회담 통역 하루 전에 고객사 사무실을 방문해 사전회의를 했다. 담당자로부터 회사소개와 주요 사업 등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회장님과 부회장님과 인사를 나누며 회담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상대국에서 관심 있어하는 주요 산업과 분야 키워드를 짚어주셔서 부지런히 메모했다. (고객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힌트이고 공부할 재료가 되니 놓쳐서는 안 된다! 특히 익숙하지 않은 지명과 이름이 많아서 다시 물어가며 잘 적어두었다.)
회장님과 부회장님은 그간 해당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히스토리를 쭉 말씀해 주셨다. 이야기가 매우 흥미진진했지만 넋 놓고 들을 수만은 없었다. 고객사는 건설사였고 해당 국가에서 오래전부터 각종 건설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해 온, 제법 오랜 그리고 깊은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상태였다.
회장님은 워낙 연세도 많으신 데다 영어를 거의 못하셨고 부회장님은 외고 출신에 유학까지 하셔서 영어를 제법 잘하셨다. 하지만 말씀을 회장님께서 주로 하실 예정이라 통역사가 필요한 것이었다. 본인이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공식석상에서는 직접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혹시라도 잘못된 표현을 쓰거나 실수하면 개인이 아닌 전체, 즉 기업이나 국가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도 있고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기 때문.
아무튼 그렇게 1시간짜리 통역을 위해 일주일 가까이 공부하며 준비했고 D-Day가 되었다.
회담은 10시에 진행 예정이었는데 현장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팀을 포함해 총 3개 기업이 각각 회담을 한다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통역사인 나는 1시간 전인 9시쯤 현장에 도착해서 1층 라운지에서 고객사를 만나 준비하면서 대기했다. 회장님께서 커피 한 잔 하라며 주문하려고 하시는걸 정중히 사양했다. 사실 모닝커피 너무너무 고팠지만 중요한 자리 앞두고 긴장도 되고 혹시나 탈이 날까 싶어 물도 잘 안 마시게 되는... 직업병이다. 동시통역은 파트너가 통역할 때 급하면 잠깐이라도 화장실 다녀올 틈이 있지만 순차통역은 내가 오롯이 다 감당해야 하니 회의가 시작되면 화장실 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특히, 대통령이랑 이야기 중인데 통역사가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대화를 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의상은 묻고 따지지도 않고 단정하게 검은 정장으로 챙겨 입었다. 통역사로서 가게 되는 대부분의 자리가 그렇지만 특히 외교통역에서는 가능하면 보수적이고 클래식한 게 좋고 튀는 색깔이나 스타일은 절대 금지다. 의전 또 의전, 기억하자.
회담은 다른 층에서 진행되어서 시간 맞춰 올라갔는데 역시 의전팀이 먼저 맞이해 주었다. 각자 신분증을 제출하고 보안검색도 실시했다. 고객사에서 선물도 준비했는데 직접 드리는 게 아닌, 의전팀에서 추후에 한 번에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내용물이 뭔지도 물어보셔서 한국 전통 다기세트라고 설명해 드렸다. 들어가서 앉는 순서도 의전팀에서 안내해 주었고 특히 문화적으로 주의해야 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사실 고객사에서는 누가 배석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고 했는데 회담장에 가보니 해당 국가 수장(총리)과 각 부처 장관까지 여덟 명 정도가 일렬로 앉아있었다. 테이블 없이 의자만 놓여 있어서 노트테이킹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별 수 있나. 그냥 해야지.
시작 직전까지 많이 긴장했는데 막상 시작하니 생각보다 편안하고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상대측 발화자인 총리님은 준비하면서 본 영상에서처럼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하게 말씀하시는 스타일이었다. 역시나 서로 감사인사를 나누고 매우 일반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통번역대학원 재학 시절에 수 없이 연습했던 각종 연설문 앞부분에 나올 법한, 아주 잘 정리된 인사말을 현장에서 순차로 통역해 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그 과정에서 혼도 많이 나고 많이 배웠습니다.
'혼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헉. 뇌 회로 풀 가동되는 게 느껴졌다. 일단 노트에는 '혼나'라고 쓰고 별표와 물음표를 달아두었다. 뒷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계속 '혼나다 뭐라고 통역하지...' 이 생각뿐이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사전적 의미인 be scolded. (대부분이 이 이걸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판단을 '혼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했다.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기도 하고 scold라는 표현으로 통역해 버리기엔 양측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 같았다.
사전미팅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실제로 과거에 관계가 껄끄러워질 정도로 프로젝트 승인도 안 해주고 이런저런 태클(?)을 많이 걸어서 일을 진행하기 너무 힘들었다고 했던 비하인드스토리가 생각났다. 해당 국가에서 오랜 기간 프로젝트를 해오는 과정에서 십수 년 전에 건설 허가와 승인 문제로 프로젝트 진행이 쉽지 않았던 것을 두고 회장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신 것.
그렇다면 다른 옵션은 뭐가 있을까.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선 통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떠오른 다른 표현이 있었다. 바로 advice(충고, 조언). 고객사 입장에서는 당시에 절차나 승인 문제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일하는 방식을 배우는 기회였고 결국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기에. 그래서 '도움 되는 조언을 많이 해주신 덕분에 많이 배울 수 있었다'는 뉘앙스로 완곡하게 의미를 전달했다.
회담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고 회장님과 부회장님은 만족스러워하셨다. 특히 부회장님께서 내가 고민했던 부분을 콕 찍어 말씀하시면서 그 부분 잘 전달해 줘서 고맙다며 엄지 척해주셨다. 알아주셔서 감사했고 통역사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 같아서 나도 만족스러웠다.
고객도 통역료가 아깝지 않고(서비스에 만족) 통역사도 당당하게 통역료를 받는(퍼포먼스 만족) 바람직한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일에 대한 보람도 더 많이 느끼고 직업 만족도도 올라가는 게 아닐까 싶다. 매번 최고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는 없겠지만 고객사도 나도 모두가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통역, 특히 순차통역을 하다 보면 순발력과 창의력의 중요성을 많이 느낀다. 동시통역은 들으면서 바로바로 처리하지만 순차통역은 노트를 보며 문장을 엮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장이나 1:1 치환이 되는 문장은 큰 고민 없이 만들 수 있지만 오늘의 예시처럼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거나 어떤 자리냐에 따라 조금 완곡하게 표현해야 할 때도 있고 분위기를 봐서 통역사가 표현의 정도를 결정해야 할 때도 있다. 듣는 즉시 바로바로 옵션이 떠오르면 가장 좋겠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찰나의 순간에 여러 옵션 중에서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표현을 골라내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습과 훈련이 많이 필요하다.
개인의 센스와 감도 아주 중요하다. 통역사가 내뱉는 대부분의 문장과 표현은 연습과 훈련, 그리고 사전준비를 하면서 습득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통역을 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턱 막히는 문장이 나오기 마련이다. (문장이나 표현 하나 정도면 다행이지!) 이럴 땐 일단 잘 들으면서 노트테이킹을 하고 과감하게 나의 센스를 믿어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일단 입을 떼고 문장을 엮어내다 보면 어디선가 듣고 읽고 써보았던 자연스럽고 좋은 표현, 해당 맥락에 맞는 표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물론, 감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연습과 훈련의 양이 채워졌을 때 빛을 발하는 것 거이겠지만.
이건 단순히 좋은 영어 표현을 보고 듣는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말이든 글이든 내가 실제로 옮겨봐야 진짜 내 것이 된다. 적용을 많이 해봐야 하는 것이다. 나는 통역이나 번역할 때 막히는 표현이 있으면 사전을 많이 찾아보는 편이다. 1번이나 2번 뜻은 대부분 아는 뜻인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오? 이 단어가 이런 뜻도 있었네? 이런 의미로도 쓰이는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많다. 우리가 막히고 고민하는 것들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결론: 1번 뜻이라도 아는 것,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1번 뜻만 아는 상태로 맥락에 맞게 통역/번역하기 어려울 때가 아주아주 많다. 그래서 통번역사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공부하고 언어에 노출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파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