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틈에서 잠시 바라보다 #2]
오랜만에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친구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였습니다. 워낙 친했기에 한참 보지 못했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모두가 공유하는 학창시절의 이야기를 나누거나 각자 지내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반가움에 우리는 연거푸 술을 빠르게 들이켰고, 그 술처럼 시간도 빠르게 흘렀습니다.
술자리의 이야기라는 게 대부분 그렇듯, 우리의 이야기도 화제를 바꿔가며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꺼낸 ‘강박증’이 화제가 되었고, 다들 자신이 갖고 있는 강박증 증세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강박증을 갖고 있다고들 하잖아요? 그래서인지 다들 한두 개씩은 그런 증세를 갖고 있더군요. 어떤 친구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올 때뿐만이 아니라 들어갈 때에도 손을 씻어야만 하고, 또 어떤 친구는 잘 때에 그게 여름이든 겨울이든 간에 무조건 창문을 닫고 자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다른 친구는 회식자리에서의 강박증을 털어놓았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감자탕 집에서 회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 감자탕을 먹고 나면 밥을 볶아 먹잖아?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윗사람 중 하나가 자신이 먹던 밥을 거기에 부어버리는 모습을 봤어. 나는 경악했지(우리들도 경악했습니다). 그 뒤로 지켜보니 그동안 몰랐을 뿐이지 계속 그러더라고. 그 다음부터 감자탕 집에 가면 다른 사람들이 먹던 밥을 넣는지를 확인하게 돼.”
그게 강박증과 관련된 이야기인지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박증은 강박증인대로, 또 취향은 취향인대로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였으니까요, 우리들은.
그러던 중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결혼식이 다 끝날 무렵 헐레벌떡 식장에 들어와 친구들의 원성을 샀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축의금을 받아주기로 했는데 늦어버렸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말을 꺼내려다 말고 입을 다무는 겁니다. 친구들은 왜 말을 꺼내다 다시 삼키냐며 친구를 구박했습니다. 그제야 그 친구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아까 늦은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 건데…… 나는 집에서 나오는 데에 보통 이십 분 이상이 걸려. 그러니까 샤워 등등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말이야. 어려서부터 외출을 할 때에는 집안을 꼼꼼히 살피고 집을 나서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몰라. 꼭 그런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도 실제로 밖에 있을 때에 내가 제대로 점검하고 나와야지만 밖의 일도 편히 볼 수가 있는 거야.
외출하기 전에 살펴보는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야. 우선 샤워를 마치고 나온 욕실부터 살펴. 욕실이 집의 제일 구석에 있거든. 현관문과 제일 멀리 떨어져있는 곳부터 확인을 시작하는 거지. 욕실 조명과 환풍기가 꺼졌는지 확인하고 화장대 위의 스킨이나 로션 등의 뚜껑이 잘 닫혀있는지 확인해. 그리고 면도기나 헤어드라이기의 플러그가 뽑혀있는지 살펴야 돼. 그 다음에 주방으로 건너가.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가스 밸브야. 밸브 하나하나를 직접 손으로 만져 제대로 잠겨있는지 확인하고, 그 다음 중간밸브를 봐. 전자레인지와 냉장고 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고, 밥솥도 확인해. 그 다음에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 등의 플러그가 뽑혀 있는지 확인하고, 창문이 닫혔는지 확인해. 휴우. 물론 계절에 따라 선풍기나 난방기 온도도 확인해. 그 다음에는 거실 텔레비전 옆의 어항을 들여다봐.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고, 어항 조명도 확인해야 하지. 이것들을 모두 확인하면 이제 집을 나설 차례야.
그런데!
밖으로 나가려고 현관문을 연 순간, 내가 앞의 것들을 모두 제대로 확인한 건지 의심이 드는 거야. 혹 ‘확인한다’는 내 행동에만 몰입한 나머지 정작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못 믿겠는 거야. 예를 들어 가스 밸브가 열려 있었는데 그것은 보지 못하고 단지 눈으로 무엇인가를 봤다는 내 행동만으로 제대로 확인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말야. 물론 직접 확인했으니 내 눈에는 그 잔상이 남아있겠지. 하지만 그 잔상조차 매일 반복되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인지 어떻게 알겠어? 어쩔 수 없이 현관문을 열어둔 채로 다시 집으로 들어가 앞의 것들을 반복해.(어떤 때에는 위의 과정을 세네 번씩 반복하는 경우도 있어.) 그리고……
이제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현관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수시로 확인해. 그리고 일층으로 내려가 건물을 빠져나가지. 아, 이제 정말 마음 편하게 외출을 할 수 있겠다, 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뭔가 찝찝해지는 거야. 내가 중간밸브를 잠그고 나왔나? 냉장고 안에 들어있던 그릇이 좀 삐져나온 것 같았는데, 그것 때문에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이쯤 되면 나 자신이 싫어져.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한 번의 부주의로 큰 손해를 입는 것보다 차라리 귀찮은 게 더 낫다는 생각인 거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미심쩍었던 것들을 확인하고, 이왕 올라온 바에 나머지 것들도 다시 한 번 점검해보기로 해. 그 모든 과정을 끝내면 다시 밖으로 나와.
이제 정말 편한 마음으로 신호등을 향해 걸어갈 수 있어. 저 멀리 이십 분마다 한 대씩 오는 광역버스가 보여. 횡단보도를 건너 정류장에 서서 다가오는 버스를 탈 준비를 해. 이제 밖에 나가서도 찝찝함을 느낄 일은 없을 거야. 모두 몇 번 씩 확인했으니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우산을 펼치려는데, 그런데, 손에 들려있어야 마땅할 우산이 없는 거야.
이런!
아까 집안을 확인하려고 다시 들어갔다가 신발장 옆에 세워두고는 그냥 나왔다는 걸 그제야 깨닫지. 버스가, 그것도 이십 분마다 한 대씩 오는 버스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하지만, 나는 다시 우산을 찾으러 발걸음을 돌려야 하지. 이거 강박증 맞지?”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친구를 향해 잔을 내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