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3-1
"엄마! 어떤 거라고?"
"으이구~ 맨 앞줄에 동그란 거!"
"다 동그란데?"
"그중에서 제일 동그란 거!"
"이건가?"
"너는 맨날 보면서도 모르니!!"
엄마는 간장을 퍼 오라고 하면서 국자와 보시기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오른손에는 국자, 왼손에는 보시기를 들고 못마땅하다는 듯 엄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내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어여 다녀오라며 도마에 대고 착착착착 대파를 썰었다.
내가 재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장독대 앞에 서서 내가 할 말이 뻔했고, 엄마 또한 '그거'라고 하면서 답답해할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늘 그런 식이다. 고추장인지 간장인지 허구한 날 헷갈리는 나도 나도지만 그런 나에게 늘 보시기를 들려 내보내는 엄마도 만만치 않다.
나는 엄마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한꺼번에 퍼 놓지 왜 맨날 조금씩 퍼다 쓰는지 모르겠다'며 꽁알거렸다. 우리 엄마는 소머즈 중의 소머즈라 내가 하는 말을 다 듣고 '나 죽으면 헷갈리지 말라고 그런다. 왜!'라며 소리를 지른다. 그다음은 뻔한 스토리다. 이깟 일에 죽기는 왜 죽냐며 친정 엄마와 딸 사이의 옥신과 각신이 있는 뭐 그런 대화다.
엄마는 장독대를 아끼고 사랑한다. 항아리를 닦고 닦으며 주문을 거는 것 같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엄마의 간장은 들큼한 맛이 난다. 엄마의 고추장은 적당히 칼칼하다. 엄마의 된장은 쿰쿰한 냄새 뒤에 따라붙는 구수함이 단연 최고다. 내가 먹는 모든 것이 엄마의 손을 탄 장독대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나도 장독을 사랑해야 마땅하지만 아직 '가깝지만 먼 당신'이다.
엄마의 주문은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적당한 날씨에 뚜껑을 옆으로 슬쩍 걸쳐놔야 바람도 통하고 벌레도 막을 수 있다. 되었다 싶으면 뚜껑을 쓰다듬듯 닦으며 옆으로 밀어 닫아야 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돌덩이를 하나씩 얹어 건들거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요즘 나오는 신식 뚜껑이 좋다지만 엄마는 그래도 옛날식이 좋다면서 일일이 열었다 닫으며 장들의 안부를 꼼꼼히 확인한다.
이런 엄마가 과연 아파트에서 살 수 있을까? 엄마의 다리가 날로 불편해지면서 우리는 엄마에게 이사를 권했다. 몸을 덜 움직이면 낫지 않겠냐고 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장독대 때문에 절대 안 된다고 하던 엄마였다. 항아리를 다 끌고 갈 수 있으면 간다고 하니 우리도 별 수 없었다. 장독대는 엄마의 자부심이자 소망 그 자체인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내 냉장고에도 엄마의 자부심과 소망이 들어있다. 혹여 양념들이 바닥을 드러낼라치면 "엄마, 나 고추장 다 먹어가." 라며 불안해한다. 나를 먹이고 나를 살리는 엄마의 손길이 끊어질 듯하여 내 마음은 이미 친정 장독대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엄마에게 묻겠지. 고추장이 어떤 거냐고.
그럼 엄마는 너는 맨날 그런다며 항아리 뚜껑을 열겠지.
아... 그래서 가깝고도 멀게 느껴졌구나. 장독대와 엄마는 떼려야 뗄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