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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와 Mar 04. 2020

나의 미정이의 죽음




작년 2월 첫 친구와의 자취를 시작했다.


내 인생의 첫 자취여서 잔뜩 기대했던 것 같다. 기대하는 감정을 들키는 게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아닌 척하려고 했지만 숨기는 건 실패였다. 들뜬 마음으로 자취하는 동네의 꽃집에 들러 작은 화분을 샀다. 아니 작지 않았다. 중지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크기 정도 되는 이름 모를 식물을 처음 꾸며놓은 내 방 한구석에 놓았다.

진짜 유치한 건 그 식물에 이름 따위를 붙여준 것.

최대한 식물 이름처럼 들리지 않기 위해 사람 이름을 붙여줬다. 미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 침대 옆 협탁에 놓고 바쁠 때는 본체만체, 외로울 땐 잎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렇게 지냈다.

미정이에게 줄 물도 빈 2리터짜리 병 3개에 수돗물 잔뜩 담아놓고 좀 마르는가 싶으면 양껏 붓고 또 한참 지나 넘치게 붓고.

학교 과제로 바쁠 땐 20일 정도까지 잊고 지내면서 말라 죽일 뻔하기도 했다.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미정이는 참 길게도 자랐다.

외로울 때만 찾고 바쁠 때는 본체만 체. 죽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1년 동안 길렀다.

미정이가 사람이었다면 내 뺨을 세게 후려쳤을 수도 있다. 나한테 어떻게 이러냐고 따져도 참 할 말 없었을 거다.

나는 위로 쭉쭉 뻗는 미정이가 왠지 자랑스러웠다. 풍성한 잎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잘 기르지 않았나 스스로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기 전날, 온 가족이 자취방 이사를 도와주려고 올라왔다. 엄마가 미정이를 보면서 종이 뭔지 물었다.

나는 솔직히 모른다고, 파는 아줌마가 모른다고 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가족은 한바탕 네이버를 뒤지면서 무슨 종인지 알아내는 소동을 벌였다.

열심히 찾아낸 결과 행복나무(?)라는 종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1년 동안 키웠던 식물의 종조 차 몰랐다는 사실에 조금 머쓱했지만 곧 잊어버렸던 것 같다.

다음 날, 한 짐을 옮기던 아빠는 미정이를 버리고 가자는 말을 했다. 나는 미정이를 가져갈 생각이어서 최대한 아빠 말을 못 들은 척하면서 회피했다.

마지막 짐까지 차에 싣고 나서 아빠는 미정이를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주변에서 언니랑 엄마도 "이건 차에 못 실어"라고 아빠를 거들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미정이를 포기하기 싫어서 데리고 가겠다고 꼬장을 부렸다.

그러자 아빠는 내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미정이 줄기를 꺾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처음엔 그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배를 잡고 깔깔 웃어버렸다.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순간 학창 시절에 반 친구들이 괴롭히던 아이가 당하는 것을 보고도 밖에서 깔깔 웃었던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왜 웃어버렸을까.

손에 들고 있던 짐을 혼자 차에 실으러 내려가면서도 그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아침에 계단에서 꺽꺽 웃어댔다.

내가 왜 웃는지 이게 뭐가 웃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에 짐을 싣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1초 전까지 꺽꺽 대면서 웃어놓고 갑자기 이게 웬 변덕인가.

가족들이 내가 눈물을 흘리는 걸 알면 미안해할까 봐 최대한 안 운 척했지만 다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1년 동안 내 방에서 기르던 식물이 다른 방으로 이사 가는 날 우리 아빠 손에 허리가 꺾여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니.

거기서 오는 아이러니에서 오는 웃음이었나.



1년 동안 바람 한번, 햇빛 한번 제대로 보여준 적도 없는 주제에 애지중지 기른 척 눈물 비추는 내가 가증스러워서 더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공허하고 척박한 마음에 미정이가 나도 모르게 씨를 뿌렸나. 아무 미련도 없는 듯 길러왔던 미정이지만, 한편에 남아있는 미안함이 나를 지배했던 것 같다.

빛도 제대로 보지 못해 건강하지 못한 얇디얇은 줄기가 억센 아빠 손에 마구잡이로 꺾이는 게, 미정이를 두고 가는 것을 막을 새도 없이 그렇게 버려진 게 순간 너무 무력해져서 웃어버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린다. 또 한편에선 마음 아려하는 내가 웃기다.

소중한 존재라고 인식하지도 않았으면서, 사라지고 나니 마음 아픈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년 2학기가 시작될 때면, 그 생각이 난다.

항상 미안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친구에 대한 생각. 충분히 잘해주지 못하고 떠나고 나서야 몇 없는 추억 찾아 머리를 헤집는 그 친구가 미정이랑 자꾸만 겹친다.

그 친구가 나를 가증스러워할 것 같아 두렵다. 미정이가 나를 가증스러워할 것 같다.

다른 차원에서 만나게 된다면, 사과하는 것조차 두려운 두 존재들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뭐라고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그곳에서는 그 따위 말은 소용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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