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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동협 Sep 27. 2022

육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영화 '아비정전'

팬데믹, 육아 그리고 아비정전

팬데믹 시대의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영화 ‘아비정전’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겹도록 외로웠던 시절에 관한 아련한 추억 때문이었을까? 막상 보고 싶은 마음은 생겼지만, 미국에서 90년대 홍콩 영화를 어떻게 구해서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지레 포기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알아봤더니 구독하는 HBO MAX에 있길래 내친김에 스트리밍해서 아내랑 보기 시작했다.


아이가 잠든 늦은 밤, ‘아비정전’은 나의 시간을 순식간에 20대의 과거로 돌려놓았다. 아쉽게도 아내는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자리를 떴다. 아비의 캐릭터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솔직히 아비가 공감하기 쉬운 캐릭터는 아니다. 결국 모두가 잠든 거실에서 나 홀로 아비정전을 봤다.


개봉할 당시에도 아비정전을 극장에서 보지는 못했다. 중경삼림, 동사서독, 화양연화를 보고 왕가위 감독의 팬이 되어서야 비디오로 빌려 봤던 영화다. 나중에 VHS 비디오로 하도 봐서 테이프가 늘어졌다. 그렇게 보고 또 보면서 공감하며 봤던 영화였다. 그것도 항상 혼자 봤다. 외로운 싱글 시절을 언제나 함께 한 영화라서 그런지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듯이 반가웠다.


천하의 바람둥이자 고독으로 똘똘 뭉쳐진 난해한 캐릭터 아비, 그를 다시 만나니 내가 왜 이 영화를 열렬히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젊은 시절 나도 그처럼 고독했고, 미치도록 연애가 하고 싶었다. 아무도 나의 고독을 이해해주지 않는 세상 속에 살며 늘 외로웠다. 지금은 아내와 아이랑 함께하는 가족이 생겨서 외롭진 않지만, 그 시절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팬데믹이라고 해도 이제는 가족이 있으니 절대 고독을 마주할 일 따위는 없다.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아비의 고독을 아득한 과거의 일로 느끼며 살았는데, 팬데믹을 겪으면서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식료품을 사는 것 이외에 밖에 나갈 일도 없고,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자, 고독이 다시 찾아왔다. 만약 아비가 팬데믹 시대를 살았더라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사랑할 사람을 찾아다니다 지쳐 쓰러지지 않았을까? 영화처럼 콜라 한 병 사며 수작을 걸었다가는 차갑게 외면당했을 거다.


화려한 배우로 살았지만 외롭게 생을 마감한 아비의 배우 장국영의 삶이 겹치면서 이 영화는 나의 뇌리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발이 없는 새가 끊임없이 날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땅으로 내려온다는 대사처럼 장국영은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박제된 기억처럼 매년 그날이 되면 그를 기억하게 되었다. 어두운 밤이면 방안에 혼자 머리를 빗어넘기며 춤을 추던 아비의 외로움이 팬데믹 시대를 대표하는 감수성으로 돌아왔다.


육아의 관점으로 다시 본 영화


20대 내 눈에는 순간의 사랑에 푹 빠진 아비의 순수한 눈빛이 멋지게 보였다. 나이가 들어서 아비정전을 다시 보니까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영화를 아이 키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봤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비는 난해한 캐릭터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한테 버림받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성장하니까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가족이다. 무릇 사람은 가족 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야지 커서도 타인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 아비가 추는 맘보춤에 맞춰 아이가 엉덩이춤을 추는 상상을 해봤다. 자고로 함께 추는 춤이 더 멋진 법! (그림: 류정화)


버림받는 상처가 너무 커서 사랑을 주지 못하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 버린 아비가 무척 안타까웠다. 영화 속에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어머니가 다른 집으로 시집가면서 아비를 지금의 양어머니한테 맡겼다. 비록 어머니한테 받은 양육비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지만, 아무런 정서적 교감을 받지 못했다. 그냥 부모한테 버려진 아이였다. 양어머니한테 학대받지 않았지만, 행복한 관계 속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다. 남자들한테 상처받고 술에 취해 쓰러진 양어머니를 보며 아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비는 사랑 대신에 물질적 풍요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게 분명했다. 고급 차를 몰며 근사한 아파트에 사는 거로 허무한 마음을 달랬을 거다. 어쩔 수 없어서 돈이나 물건으로 아이의 마음을 사려는 부모가 더러 있다. 그러나 사랑 없이 물건으로 채워진 관계는 쉽게 무너진다. 근사한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갈까?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으로 채워지는 관계는 소모적이다.


아비는 사랑 대신에 돈으로 만들어진 가정에서 성장했다. 돈이나 물건은 상호 교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관계만 허용된다. 그의 사랑이 일방적인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그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줬다가 부담이 되면 일방적으로 사랑을 끊어버린다. 아비가 수리진(장만옥)를 매일 찾아가 사랑하는 것도 순수한 열애로 볼 수도 있지만, 나중에 헤어질 때는 너무 매정하다. 좋아하던 물건이 유효 기간이 끝나자 사정없이 버리는 것처럼 아비는 물건을 소비하듯 연애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도 자식을 키우면서 물건이나 돈으로 사랑을 대신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장난감 하나 더 사주는 것보다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고 함께 놀아주는 게 더 나은 육아라고 믿는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억은 물건보다 오래간다. 내가 사랑해주는 만큼 아이도 더 사랑할 줄 알게 되니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려고 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가족한테 배우지 못했다면 밖에서도 쉽게 배울 수 없다.


아비가 매력적인 캐릭터인 건 확실하지만 내 자식을 그렇게 키우고 싶진 않은 게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수많은 여자의 사랑을 훔치고 도망치며 살았던 아비가 내 자식이라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하던 아비가 다시 연인을 버리는 삶은 반복한다. 아비의 비극적 삶이 영화적으로 깊은 울림을 주지만 그게 내 가족이라면 그 악연의 고리를 어떻게든 끊어주고 싶다.


이 영화에서 1분의 시간은 낭만적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될 만큼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아비는 수리진과 시계를 1분 동안 함께 보면서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주문을 외우듯 속삭인 그 말은 수리진의 마음속에 영원히 박혀서 떠나질 않는다. 나는 여기에서 어머니와 그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어린 아비의 그리움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아비는 그 짧은 순간의 만남 간절히 원했다. 그러다 그는 홀연히 필리핀으로 생모를 만나러 떠난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꿈을 드디어 이룰 수 있을까. 단 1분 만이라도 어머니와 사랑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 아비정전 속 1분의 시간은 영원한 기억될 만큼 강렬하고 애절하다. 단 1분이라도 아비가 친어머니와 보내고 싶었던 영원한 유년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 류정화


아비의 낭만적 삶에 깔린 애정 결핍이 느껴지면 마냥 멋지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고 슬프다.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그는 사람 사이를 날고 있는 발 없는 새가 되었다. 발 없는 새는 사랑받지 못해서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고 한다. 부질없는 그 날갯짓은 거울 앞에서 홀로 추는 맘보춤처럼 공허하다.


팬데믹 시대에도 유효한 아비의 사랑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아비가 1분이라도 공유하는 시간에 집착하게 되는 심정이 팬데믹 시대에도 통한다. 딱히 사랑이 아니더라도 1분의 시간이라도 정겹게 나누는 게 힘들어졌다. 인간 사이의 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점점 멀어졌다. 행여 마주칠까 봐 눈빛도 피하고, 얼굴도 가린 채 최소한 대화만 나누고 살아야 한다. 이게 사는 건가.  


만약에 팬데믹이 더욱 악화하여 고립 생활이 길어지고 그 시기에 아이들이 태어난다면 유년을 외롭게 보내야 한다. 그 아이들의 삶은 처참하게도 아비를 닮아갈지도 모른다. 이대로 살다가 모두가 미치지 않을까. 기본적인 정도 나누기 힘들어지면서 모두가 아비처럼 고독한 세계에 갇혀 간다. 전염병이 아니라 외로움 바이러스가 퍼져 인류가 멸망하지 말란 법도 없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하루에 한 번이라도 1분이라도 아이랑 대화하려고 한다. 평생 잊지 못할 대단한 순간은 아니더라도 아이가 지옥의 고독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그물을 엮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한다. 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서 10분, 10시간, 10일이 되기를 바란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아비의 고독한 시간이 내게로 와서 사랑을 주는 힘이 되었다. 사랑받지 못한 그의 소외된 삶이 누구보다 더 사랑하며 살라는 메시지로 들리는 건 지나친 소리일까.


그림: 류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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