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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동협 Jan 23. 2024

추락을 피해 바닥으로

[영화평] 현기증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자주 현기증을 느끼는 형사 스카티 퍼거슨(제임스 스튜어트)이 사고로 경찰직을 그만두면서 우연히 겪게 되는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대학 동창이자 애인이었던 미지가 있다. 미지는 스카티를 여전히 사랑하기에 그에게 도움을 준다. 미지와 스카티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전반적인 극의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다.


현기증의 근원은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암시적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다가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범인을 추적하던 스카티는 지붕에서 매달려 아래를 바라보다 현기증을 느낀다. 그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경관을 보고 끔찍해진다. 자신도 경관처럼 아래로 떨어져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스카티가 겪고 있는 공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점층적이다. 그는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높은 곳에 올라가기가 두렵다. 그가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점차 타당한 근거를 갖게 되고 더 이상 높은 곳에 오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캐빈 앨스터에게 높은 곳이 아닌 곳에는 문제가 없다며 자신 있게 말한다.


스카티가 겪는 현기증은 내러티브의 초반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로 주목받지만,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서 힘을 잃어버린다. 히치콕이 즐겨 쓰는 맥거핀이 현기증에서도 적용된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스카티의 현기증이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게 된다.


앨스터는 스카티가 높은 곳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아내가 정신적인 방황 때문에 자살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그를 이용한다. 앨스터가 스카티에게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그의 현기증이 자신이 아내를 정당하게 살해하는데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메인 플롯에서 현기증은 살해에 이용당하는 피동적인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화의 또 다른 플롯인 서브플롯에서 현기증은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현기증이 중심 플롯과 서브플롯을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스카티는 앨스터 부인을 잃고 나서 심한 현기증 상태에 빠져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스카티의 현기증으로 비롯된 사건이 바로 현기증 때문에 해결할 실마리를 얻게 된다.


중심 플롯에서 스카티는 시간적인 현기증을 느낀다. 현재의 샌프란시스코와 과거의 샌프란시스코 사이에 겪는 현기증이 바로 사건의 흐름을 주도한다. 스카티는 대학 동창 앨스터를 만나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듣는다. 처음에 그는 친구의 말을 거부하지만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사건을 맡는다. 앨스터 부인이 과거의 유령인 칼로타 발데스에게 영혼을 빼앗겨 있다는 것이다.


한 집안의 내력이 동시대에 재현되는 것은 시간이 축약되는 데서 오는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현기증의 근원은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순간적으로 압축되는 데서 오는 공포이다. 이 사건은 그런 공간적인 깊이의 축약을 넘어서 시간적인 축약에서 오는 공포를 전달한다. 시간적인 축약이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는 곳은 숲 속에서 스카티와 앨스터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앨스터 부인은 2천 살이 넘은 나이테를 보면서 과거의 시간에 일어난 자신의 삶을 말한다. 나이테에 재현된 일생의 모습은 시간이 공간화하여 축약된 것을 의미한다.


앨스터 부인이 현재를 살면서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과정은 순간적인 축약의 공포를 표현한다. 현재의 삶은 인간의 역사가 이룩한 높은 지점이고, 과거의 삶은 역사가 축적되기 위해 기반이 되는 낮은 지점을 의미한다. 칼로타 집안의 내력에서 칼로타는 낮은 지점에 있는 역사이고, 앨스터 부인은 높은 지점에 있는 존재이다. 앨스터 부인이 칼로타의 삶을 26살에 재현하는 것은 높은 존재가 낮은 지점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추락은 깊을수록 의미를 띠게 된다. 추락이 발생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은 깊이의 생성이다. 인간의 역사도 시간적인 깊이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인 시간은 이중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볼 때는 깊이가 되지만, 과거에서 현재를 바라볼 때는 높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로 과거를 유추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대결하는 두 자아는 과거의 칼로타와 현재의 앨스터 부인이다. 칼로타가 앨스터 부인의 영혼을 지배하려는 것은 역사의 힘이고, 앨스터 부인이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인간의 힘이다. 결론은 말할 것 없이 역사의 승리로 돌아간다. 우리가 흥미를 갖는 부분은 역사의 승리가 아니라 역사적 힘을 거부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앨스터 부인이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계속 비상하지만, 추락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인간적 노력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결국은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기증은 단순히 이런 평범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인간들이 끊임없이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이다. 스카티가 드디어 현기증의 악몽을 극복하는 모습은 그러한 일면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다.


앨스터 부인이 죽게 되는 이유는 그녀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칼로타의 희생이 앨스터 부인을 높게 하였고, 사회적으로 선조의 부가 그녀의 지위를 높게 하였고, 그녀의 미가 남들 위에 있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높은 곳에 있었기에 낮은 곳으로 추락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녀가 애초에 낮은 곳에 머물렀으면 더 이상 낮아지지 않았을 것이고, 비록 추락한다고 해도 그 피해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추락은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반면에 스카티는 그녀와는 달리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게 거세된 인물이다. 그도 역시 높은 곳을 꿈꾸고 있었음을 미지와의 대화에서 드러나 있다. 그는 한때 경찰청장이라는 높은 곳을 향해 오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물리적인 병이 그의 의지를 꺾어 놓았다. 그의 좌절된 모습은 공포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그에게 추락은 사회적 삶이 제거된 자아를 뜻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된다. 동창회에도 나가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는 정체된 생활을 한다. 스카티와 앨스터 부인과의 만남은 사회적 추락과 역사적 추락의 절묘한 만남이다. 물론 앨스터 부인의 추락은 다른 추락들을 함유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추락은 역사적인 것이다. 스카티는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앨스터 부인을 만나면서 또 다른 추락을 경험한다.


앨스터 부인의 여정을 살펴보면, 꽃가게, 돌로레스 교구의 묘지, 리전궁의 미술관, 에디가의 낡은 저택인 맥키트릭 호텔이다. 이들의 특성은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죽은 이를 참배하는 묘지, 과거의 인물들이 초상화를 통해서 살아 있는 미술관, 과거에 살았던 곳에 대한 기억이 있는 호텔들은 모두 과거의 힘이 작용하는 곳이다. 앨스터 부인이 이곳들을 둘러보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과거의 영혼의 힘에 이끌려 현재의 활동이 정지된다.


앨스터 부인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는 스카티는 자신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그는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앨스터 부인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가 하는 역할을 앨스터 부인의 추락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신도 그 추락에 동참하는 것이다.


일정한 지향점을 상실한 추락은 스카티를 극단적인 정신의 혼란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앨스터 부인이 역사적 시간으로 추락한 시점인 성당에서 추락 이후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린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앨스터 부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머무른다. 그의 의식은 앨스터 부인이 죽는 순간에 멈추어 버렸다. 앨스터 부인이 했던 일은 그가 반복하고 있다.


스카티의 시간은 과거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가 매들린을 만나는 순간 그의 추락은 보다 박차를 가한다. 매들린에게 앨스터 부인의 역할을 하도록 강요한다. 그는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으로 떨어지고 싶어 한다. 그 추락의 끝에 있는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그는 추락을 감행한다.


앨스터 부인과 매들린의 차이는 충분히 현기증을 유발할 만하다. 겉으로 보기에 외모만 닮았지 성격이나 행동거지는 전혀 딴판인 매들린은 앨스터 부인의 악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앨스터 부인의 역할을 한 매들린은 똑같은 인물이었다. 매들린과 앨스터 부인은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모를 통해서 맺어진다. 따라서 두 인물 사이에 놓여 있던 모든 차이는 순간적으로 압축되어 합쳐진다. 한 번 합치된 이들의 운명은 떨어질 수 없는 고리로 묶인다.


매들린은 계약의 실행으로 앨스터 부인과 멀어지지만 스카티를 다시 만나면서 다시 앨스터 부인이 되어 죽는다. 또한 그녀는 목걸이로 인해 칼로타와도 인연을 맺게 된다. 비록 영화 속에서 세 인물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압축되어 한 인물이 된다. 스카티가 추적한 각각의 삶은 다른 모습을 한 하나의 운명이었다. 그는 현기증이라는 추락의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사랑도 잃고, 사회적 지위도 잃어버린 바닥에 있었다. 그는 사회적 추락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서 스스로 바닥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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