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둘째 날
나와 J의 MBTI는 INFP다. 우리는 그리고 ‘인프피’ 답게, 게스트하우스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현란한 술자리에 좀체 끼지를 못했다. 사실 끼지 못한 건 아니고 안 낀 거다(?). 마음만 먹으면 낄 수 있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귀찮았다. 차라리 혼자 있었으면 어떻게든 군집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인간의 알량한 생존본능으로 인해 적어도 자리는 지켰을 거 같은데, J가 있다 보니 우리는 동떨어진 섬 이른바 우도처럼, 결국에는 둘이 따로 떨어져 나와 사람들이 남기고 간 방문록이나 구경했다.
나는 이처럼 나 말고도 본인들끼리 충분히 알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라면, 입을 거의 열지 않는 편이다. 누가 말을 걸어준다 해도 한 두 마디 겨우 대답하는 게 전부다. 하지만 당장 말해야 할 사람이 나밖에 없거나 나라도 나서서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어색한 자리라면, 그리고 그 자리에 내 친구가 최소 두 명(어떤 친구냐에 따라 가끔 한 명도 가능하다)은 있어준다면, 그때만큼은 ‘ENFP’에 빙의한다. 대충 광대처럼 떠들어댄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ENFP가 광대라는 의미는 아니다.) 먼저 대화 주제를 던지고, 질문하고, 틈만 나면 시시한 드립을 쳐댄다. 물론 그 드립이 먹혀들지 않으면 모든 자신감을 잃고 급속도로 조용해지겠지만, 앞선 전제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으며, 내 친구들은 대개 나의 개그를 좋아해 주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선 90%의 확률로 성공하고는 한다. (다들 열심히 웃기라도 해야 덜 어색해지리란 걸 알기 때문일 수도.) 아무튼 그렇게 웃음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오다 보면 분위기도 조금씩 풀리기 마련이고, 대충 그럴 때쯤에 술이나 연거푸 마셔대면 이제 제법 친해져서 다들 알아서 잘 떠든다. 그럼 나는 이제 사명을 다 했다고 안도하며 다시 INFP로 돌아가 점잖아지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게하에서는 저들끼리 잘만 떠들기도 했고 내 친구도 한 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INFP의 지조를 지켰다.라고 포장은 했지만, 사실 그때 우리는 좀 찐따 같았다. 그런 우리가 불쌍했는지, 스탭으로서 모든 투숙객을 겉돌지 않게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이라도 있으셨는지, 한 스태프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셨다. 그런데 역시 재미가 없었는지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느끼셨는지, 한 다섯 마디 정도가 힘겹게 오가다가 그분은 제자리로 돌아가셨다. 끊임없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뒤 테이블 술자리로 말이다.
아무튼 나와 J는 앞으로 한 며칠간은 계속하게 될 ‘둘이서 대화하기’ 말고는 별다른 할 일이 없었기에 일찍 잘 준비나 했다. 11시면 소등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그들은 11시가 넘어가는 와중에도 파하지 않았고, 하다 하다 기타까지 쳐댔다. 나는 방에 들어가 시끄러운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니, 조금도 웃기지 않은데 대체 뭐가 저렇게 재밌다고 웃는 거지?’라고 생각하다 다들 웃음이 헤프시다는 결론을 내렸던 거 같다. 그러고 단 한 개의 화장실을 대충 열댓 명이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불편하며 눈치 보이는 일인지를 퇴실 때까지 내내 실감하며, 로망으로 시작했던 나의 첫 게스트 하우스 체험기는 냉엄한 현실로 막을 내렸다. 앞으로는 가급적 안 가기로.
그렇게 다음날에는 대망의 흑돼지와(게하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유일하게 이곳에 오길 잘한 이유가 되었다.) 소맥을 말아먹고, 스타벅스 제주 한정 음료도 세 개나 마셨다. 나는 까망라테보다는 쑥 프라푸치노가 더 맛있었는데 J는 전자를 좀 더 마음에 들어했다. 그냥 취향껏 마시면 될듯하다. 그러고 우도로 이동하면서, 나는 대망의 ‘속세와 거리두기 3단계’를 발령했다.
6.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 삭제하기
이름처럼 거창할 건 아니고 그냥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을 삭제 및 비활성화하는 일이었다. 전화번호도 바꾸려다가 말았다. 원래는 어플 삭제가 아닌 계정 탈퇴를 고민했지만, 그러면 사람들에게 (알 수 없음)으로 뜰 텐데, 그에 따른 일말의 관심도 받고 싶지 않았고(물론 관심을 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이 나라의 랜선을 지배하는 것은 삼성보다는 카카오 아니겠나. 카카오 계정과 연동해둔 어플 등이 너무 많았기에 이래저래 불편함이 따를 게 뻔했다.(그러고 보니 브런치도 카카오의 하수다. 역시 안 하길 잘했다.) 그리고 나는 추억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웬만한 대화방은 절대 나가지 않고 쌓아두는 사람이라서인지 탈퇴 시 대화나 사진 등이 영영 날아가버리는 일도 달갑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그냥 어플을 지우고 상태 메시지에 ‘카톡 X’라고 써두는 것으로 자신과 합의를 보았다. 인스타그램에는 비활성화라는 훌륭한 기능이 탑재돼있어서 그냥 그걸 누르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삭제도 진행했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렇지만 카카오톡은 중학생 때부터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지내온 내 인생의 동반자와 다름없고, 인스타그램은 나는 원체 스토리충이라 지인이 스토리를 올리면 3초 만에 클릭하는 것이 내 특기인데, 내가 얘네 없이 살 수 있을까? 금단증상이 극심해져 탈수나 수전증에라도 시달리는 게 아닐까?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런 걱정도 안 한 것은 아니다. 또 내가 이런 식으로 잠수를 타버리면 과연 몇 명이, 누구누구가 나를 찾아줄지(찾아주기는 할지)에 대해서도 유치한 호기심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또 너무 길어졌으니 다음 편에 계속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