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들이 신생아중환자실에 오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른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엄마 뱃속에서 빨리 세상으로 나왔기 때문에 아직 숨을 쉬는 것도 젖병을 빠는 것도 미숙해 이곳을 거치며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게 된다.
이곳은 아기들을 위해 한여름에도 따뜻한 실내온도를 유지하고 누워있을 때도 엄마 뱃속의 안락함을 유지하도록 한껏 웅크린 자세를 취하도록 도와준다.
[2023년생]이라는 생일을 보며 드는 기분은 마치 1995년생인 내가 192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바라보는 느낌과 같다. 한 세기의 2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니. 동시에 그들이 살게 될 세기가 궁금해졌다.
과연 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어떤 곳일까?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는 미래에서 온 남자 주인공 치아키가 여자 주인공인 마코토에게 미래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돌아가야 했는데 여름이 돼버렸어.
너희랑 있는 게 너무 즐거웠거든.
강이 땅에서 흐르는 걸 처음 봤어.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고,
하늘이 이렇게 넓은지 처음 알았어.
무엇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 봤어.
우리에게 아주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일상이 미래에서 온 치아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하루였던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이 영화를 보며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미래에는 파란 하늘이 없으면 어쩌지?
이처럼 미래의 모습이 현재와 사뭇 다를 것이라는 건 누구나 수긍하는 사실이다. 당장 넷플릭스 대문짝에 걸린 영화만 보더라도 모종의 천재지변이나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지구에 살아남은 마지막 인류와 같은 주제를 다룬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것처럼 우리의 상상력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서 경험할 미래는 SF영화에 있을 법한 상상불가의 격변보다는 현재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세상이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의 관심은 아마 100년 뒤 내 증손자들이 살아갈 세상보다는, 10년 뒤 내가 먹고 살려면 무엇을 배워야 하며, 더 나아가서 나의 자녀 세대가 잘 먹고 잘 살려면 어떤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일 것이다.
요즘은 교육을 잘 받아도 5년이면 오래된 지식이 돼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길러야 하는 것은 나가서 뭘 배울지 찾을 수 있는 능력이죠. _ 김무환 포스텍 총장
오늘 배운 지식이 내년이면 금방 낡은 지식이 되는 시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속도 빠른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까?
소설 <변신>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사실 생전에 문학도가 아니라 법학을 전공해 보험회사에서 헌신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언제나 문학에 있었지만, 자식의 학문적 출세를 염원한 부모님의 기대에 부흥하는 삶을 살다 결핵으로 요절한 뒤에서야 그의 소설은 친구에 의해 문학계에 알려지게 된다.
나는 프란츠 카프카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 학생들이 떠올랐다. 쉴틈 없이 공부만 하다 꿈꾸는 방법을 잊어버린 우리 아이들 말이다.
의치한약수를 가기 위한 메디컬 입학시험으로 변질되어 버린 한국 수능
https://www.medicaltimes.com/Users/News/NewsView.html?ID=1150668&FollowTag=의대·의학전문대학원%20합격%20점수%20분석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2515540000532
전 국민의 절반이 넓고 한적한 곳을 떠나 서울이라는 좁은 도시로 몰려든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점점 좋은 것에 사람이 몰리고 우열을 가리기 위해 경쟁한다.
산업사회 이후 국가발전을 이끈 도시화는 동시에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응집과 경쟁> 한정된 재화를 쟁취하려면 경쟁할 수밖에 없다.
도시의 응집력은 도시로 인재를 모이게 해 지식과 능력이 자유롭게 교환되며 창의적 발전으로 이끌지만, 역설적으로 제한된 공간에 모든 것이 모일 수 없고, 결국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책 <린치핀>에서는 성공의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여유있는 삶 대신 치열함의 챗바퀴만 반복될 뿐인 세상을 점근선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점근선을 떠올려보자. 98%에서 99%는 단 1%의 차이지만, 99%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98%에 쏟았던 x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소름끼치는 사실은 x는 무한이어도 y는 절대로 100%라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결과로 평가하는 삶이 가져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닌 무한경쟁 끝의 허무함이다.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우리는 98%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옆사람보다 더 높은 99%, 99.9%에 도달하기 위해 기이한 수준의 노력을 퍼붓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불필요한 경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모두 같은 그래프 위에서 똑같이 도달할 수 없는 100%를 향해 불필요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네 삶을 갉아먹고 친구를 적으로 만드는 경쟁을 협력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자신만의 그래프를 그리는 것이다. 똑같은 점근선의 완벽을 향해 달리는 그래프가 아닌, 나만의 독특한 그래프를 그리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나만의 독특한 그래프를 그려나가는 삶을 살기 위해 중요한 태도와 능력에 대해 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