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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꾸꾸 May 06. 2023

고단한 발걸음을 함께하면 즐거움으로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4월 말에 전공의들이 모인 단톡방에 대뜸 이런 공지가 올라왔다.


"어린이날을 맞이해 작은 음악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악기 연주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분들을 연락 부탁드려요:)"


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악기연주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작은 음악회라니. 초등학교로 돌아간 기분에 5월이 혼미하게 바쁠 것이란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적적한 병원에서 심심할 아이들을 위해 퉁탕퉁탕 악기연주를 할 생각에 젖어 홀린듯이 카톡을 보냈다.


"선생님 저 피아노 칠 수 있어요!!"


그렇게 총 8명의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들이 모였다.





일단 저지르고 나중에 수습하기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는 일단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을 100개 하고 나중에 수습한다. 하나를 100% 완벽하게 할 생각으로 1개만 시작하는 것 대신에, 일단 시작하고 나중에 수습한다. 그럼 전부 완벽하게 해내진 못해도 끝은 맺는 수백가지의 결과와 교훈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완벽하게 할 게 아니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했는데, 세상에 완벽은 존재하지도 않고, 사람들도 완벽을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언제부턴가 깨달으면서 그냥 하고 싶으면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의 우당탕탕 어른들의 학예회가 시작되었다.


분명 미리 연습할 줄 알았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공연 2시간 전에서야 마련된 연습 장소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눌과 뚜 나는 리코더와 플룻, 피아노로 뽀로로 노래와 요즘 인기가 많다는 문어의 꿈을 연주하기로 했었는데, 대폭 계획 수정에 들어갔다.


"안 돼 안 돼. 두 곡은 무리야. 뽀로로만 간다!"


안 그래도 바로 전 날 당직을 하고 와 제정신도 아니었거니와, 피아노도 한 대라 두 팀이 돌려가며 연습을 해야 했던 탓에 한 번 연습을 해보고는 다시 계획을 바꿨다.


"안 돼 안 돼. 2절은 무리야. 1절만 간다!"



어찌 됐든 한 곡을 완성해서 병동 엘리베이터 앞에 마련된 간이 무대에 섰다.


"자 여러분! 어린이날을 맞이해 선생님들이 작은 음악회를 준비했어요. 정말 기대가 되지 않나요~? 그럼 이번 곡은 뽀롱뽀롱 뽀로로입니다!"



"이야 뽀로로다!"

"아악 잠깐잠깐잠깐!!! 다시다시다시!!!"



우당탕탕 부족한 연주회가 어떻게 끝난 건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우리의 연주를 보며 작은 기쁨과 활기를 얻었기를 바라본다.







요거트가 주는 작은 위로

고단한 발걸음을 함께 하는 순간 즐거움으로



당직시간이 시작되고 시끌벅적하던 병동은 금세 고요로 가득 메워졌다. 이 많은 환자를 밤사이 혼자 봐야 한다는 압박. 물론 언제나 도움 줄 든든한 선배와 동료들에 마음은 항상 즐겁지만, 왠지 모르게 대낮의 정신사납던 활기가 사라진 병동은 언제나 어색하고 낯설다.


하루는 잠을 못자고 탈진상태 직전에 처음으로 병원에서 저기압 상태였던 날이었다. 퇴근 시간을 넘어 의국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바쁜 코크로치를 만났지만 도저히 웃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 미안한데 너무 도와주고 싶지만 오늘은 진짜 너무 힘들어서 먼저 갈게..."


혼수상태로 뛰쳐나오듯 나선 병원, 집으로 가는 길에 눈물이 차올랐던 것은 분명 부족한 잠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신 없이 왕십리 지옥철을 내려 핸드폰을 보니 연락이 와있었다.


“효한테는 지금 요거트가 필요해.”

"선생님 많이 고된 하루였죠? 병원일은 병원에서만 생각하고 집에서는 푹 쉬어요."


하루종일 나를 조금이라도 도와줄 생각에 옆자리를 지키던 눌이 대뜸 요거트 선물을 보냈다. 안 그래도 요거트를 사러 집 앞 그릭데이로 걸어가던 중이었는데, 언제나 나의 마음을 읽는 눌을 보면 가끔은 귀신같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치프 선생님의 작은 위로가 더해져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렸다.


하얗고 친절한 치프 선생님은 우리보다 몇 배는 바쁘실 텐데도 언제나 우리 1년차들을 살뜰히 챙겨주신다.


"우리 도움 줄 마음 가득한 사람들이니까 언제든 물어보세요!!"


고단한 발걸음은 함께 내딛는 순간 즐거움으로 바뀐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 1888 캔버스에 유화 72.5 x 94cm | 오르세 미술관


무서운 것을 혼자 상대할 때와,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작게 그려져 있지만 이 부부가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는것이 느껴집니다. 덕분에 이 밤 전체가 무섭거나 두렵지 않은 공간으로 변화했습니다.


색채의 마술사인 고흐가 건네는 따뜻한 어둠에 불안과 근심을 내려놓으세요.

아를의 강가는 어느덧 편안한 꿈길의 배경이 되어줄 것입니다.


_<그림의 힘> p221 김선현 지음






Epilogue

죽겠다 연진아


새로운 새싹이 움튼 5월이지만, 솔직히 이번 한 주는 정말 많이 힘들었다.

아. 탄식.


하루는 일하는 내내 왜이렇게 덥지?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틀만에 밖으로 나와보니 퇴근길 두런두런 걷는 사람들 손에 하나씩 우산이 들려 있었다. 어쩐지 병동이 습해 자꾸만 가운을 벗어 제끼고 싶더라니.


병원에서 맞이한 아침과 이틀만에 돌아온 집 앞 거리


48시간 같은 병원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마주한 길거리는 신기루같다. 저녁 어스름 내리앉은 대학로에는 생기 넘치는 대학생들의 잔잔한 활기로 가득한데, 요새 내가 영화 인셉션 처럼 꿈 속의 꿈에 사는 기분이라, 어느 세상이 현실인가 싶기도 하다.


뭐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조금 더 일을 효율화시켜봐야겠다... (혼자만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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