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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숲 Jan 01. 2022

06. 할머니 집에서 떡국을 끓이며

할머니의 기억

치매 진단을 받았던 할머니는 장기요양보험 5등급을 다시 받고, 작년 초부터 방문 요양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


평일 하루 세 시간 정도이지만 누군가 매일 일상을 지원해주고 대화를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할머니의 증상은 훨씬 호전되셨다. 우울감도 많이 사라지셨고, 건강했던 예전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신다.


여전히 오랜 세월 사용하던 물건들을 생소해하며 '누가 이걸 가져다놨어?' 하시지만, 예전처럼 우울해 하시거나 있지도 않은 물건을 가져갔다며 화를 내시진 않는다. 요양보호사님 덕분에 모든 면에서 더 좋아지셨다.


그저 매일 누군가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안심이 되고, 아주 감사한 일이다.


12월 25일, 1월 1일과 같은 날에는 할머니 댁에 들려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시간을 보낸다. 최근 기승인 코로나19 때문에 가족들은 다 같이 모이질 않는다. 오늘은 나 혼자 가서 할머니와 떡국을 끓여먹었다.


할머니는 과일을 자꾸만 까서 먹이고, 떡국떡을 자꾸 내 그릇에 넘기면서 수십 번 들었던 옛날 얘기를 또 하신다. 오늘은 불과 몇 분 전에 하셨던 이야기를 되돌려 감기한 듯 다시 새롭게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다시 재밌게 들어드린다.


어릴 적에 학교도 못가고 애보기를 했다고 하신다.어느 날은 냇가에서 팔을 다쳤는데도 숙모가 혼내기만 해서 서러웠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애보기를 시키려는 할머니와 대신 나서서 화를 내주어 고마웠다는 형부 이야기를 한다.


나는 힘드셨겠어요, 서운하셨겠어요, 고마웠겠어요, 하고 마음 속의 감정 수수깨끼를 맞추는 사람처럼 공감해준다. 할머니는 내 장단에 맞춰서 천천히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내 공감을 받으며, 할머니의 "팔을 다쳤다."는 말이 "그때 많이 서러웠다"가 되고 형부에 대한 기억은 친오빠같이 착했던 형부에 대한 그리움이 된다.


아마도 할머니가 자꾸 그 일을 떠올려 이야기를 하시는 데에는 그때의 감정이 마음에 깊이 남아있기 때문일 테다.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일을 많이해서 몸이 아팠고, 여자라는 이유로 어린애임에도 학교를 가는 대신에 집안일을 하고 갓난애기를 여럿 봐야했다. 그런 어린 시절은 한(恨)이 되어 남는다. 서운함과 고마움을 주었던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떠올리신다.


나이 들어가며 느끼는 외로움과 서러움, 그리고 찾아와주는 우리 가족들과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이 모든 감정이 그 이야기에 다 녹아있기 때문에 할머니는 계속 그 이야기를 떠올리고 또 떠올리시는 건 아닐까.


나는 할머니가 원하는 만큼, 감정을 떠올리고 기억을 되짚어 보시도록 공감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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