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낼 수 있어.
7월의 어느날, 갑자기 달리고 싶어졌다. 안 뛴지 10년이 넘어 잘 뛸 수 있을지 자기검열이 계속 됐다.
내가 잘 달릴 수 있을까? 아니야, 걱정은 뒤로 하고 우선 달리고 싶어졌을 때 달려보자.
그날 저녁, 집에서 좀 떨어진 운동장 트랙을 찾았다.
뛰어도 뛰어도 출발점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첫번째 원이 완성되지 않았다. 한바퀴도 채 못 뛸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며 뛰고 있었다. 내가 이상한건지 저 사람들이 이상한건 지 대혼돈이었다.
러닝크루에 들어가 함께 뛰었는데 한바퀴만 뛰면 내 체면이 안설 것 같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이럴때 나오는 자존심 아주 환영해.
다른분들은 5km를 뛴다는데 나는 첫술에 배부르랴, 2km만 뛰어도 아주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뛰면서도 1km가 어느정도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이정도면 많이 뛴 것 같았는데 알고보니 0.5km였다. 이렇게 4번을 더 뛰어야한다니...(절망)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자존심이 힘 겨루기를 하다 결국2km를 채울 수 있었다. (고맙다 내 자존심)
얘기하면서 뛰는 저들이 참 부러웠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뛸 수 있을까?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추석쯤엔 저도 5km 뛰어볼게요! 하며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몇번을 뛰다보니 정말 5km를 뛰게 되었다.
정말 추석때였다.
아직도 너무 힘들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도 안 힘들어보여 옆에서 같이 달렸던 분께 여쭤봤다.
“안힘드세요?”
“아뇨, 죽을 것 같아요!!”
와, 다른 사람도 힘든데 참아내는 거였구나…!
큰 위로가 되는 한편, 다들 잘 버티는구나 대단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5km를 처음 완주한 날 성취감은 생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에 또 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직 자신이 없었다. 다음 5km를 뛸 때가 중요했다.
몇번의 연속된 경험이 중요하다 생각되어 그 다음부터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더욱 공을 들여 뛰었다.
뛰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오늘은 다 못 뛸 것 같다, 저녁이 아직 소화가 안된 것 같다, 라면을 괜히 먹었다, 배가 좀 따가운데,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만뛸까, 엄살을 부리는 자아들이 완주를 격려하는 자아와 협상을 벌인다.
엄살 자아는 매일같이 반복된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을 잠재울 아주 강한 주장이 필요하다.
[지난번에도 뛰었으니 이번에도 뛸 수 있다.]
[지금 너무 힘들지만 지난번에도 이만큼이나 힘들었다. 그런데도 결국 다 뛰었다. 항상 다 뛰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 있다.]
이 생각을 반복해서 한다. 그래도 너무 힘들면 뇌를 내려놓고 뛴다고 생각한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뇌는 사실 없다. 몸만 열심히 움직이는 기계다. 이렇게 힘들지만 죽지 않는다.]
이 생각들을 반복하면 어느새 ‘중간지점에 도달하였습니다.’ ‘2km 남았습니다.’ ‘1km 남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완주하였습니다’ 의 상냥한 목소리로 나의 성공을 알려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오늘도 완주하였구나, 힘들었지만 오늘도 해내었다. 역시 해낼 수 있었다. 잘했다 내자신.
우리의 하루하루도 비슷한 것 같다.
일반적으로, 힘든일은 언제 어디서나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오늘의 숙제는 이거야, 하면서 마구 던져준다.
그럼 기꺼이 받아든다.
오늘은 이거야? 그래, 오늘도 할 수 있어.
전날도 잘 보냈고, 전전날도 그럭저럭 지냈고, 전전전날도 가까스로 넘겼으니 오늘도 그럴 수 있어.
힘이 들 수는 있는데 결국 지나갈거고, 보낼 수 있을거야. 할 수 있어.
잘 할 수 있다는 말은, 하는 것 자체가 힘이 부칠때가 있다.
그 대신, 지낼 수 있다는 말은 조금 더 용기있게 할 수 있다. 지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