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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연주 Mar 23. 2020

겨울 옷을 정리하며

트위드 재킷만 걸쳐 입고 밖을 걸어 다녔는데 춥지 않았다. 어느새 겨울이 지나간 것 같다. 아직 옷장에 걸려 있는 두툼한 겨울 옷들이 생각났다.


이번 겨울에 나는 2개의 패딩과 2개의 코트 정도로 겉옷을 번갈아 입었다. 그러다 가끔 아주 추울 땐 촬영장에서 입는 두툼하고 긴 롱 패딩을 꺼내 입었다. 그밖에 가지고 있는 다른 코트들과 패딩들은 입지 않았다는 걸 겨울이 다 지나고서야 깨닫는다. 재작년과 작년에 옷을 꽤 나누거나 기부하거나 버려 필요한 겉옷만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가 입지도 않을 필요 이상의 많은 옷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 옷장 정리를 해야 하므로 이참에 다시 옷들을 보내기로 다짐한다.



몇 년 전, 내가 과도하게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자각한 뒤로 물건을 처분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물건을 처분하는 일은 마치 밀려 쌓아 놓은 학습지처럼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겨우 두 해 전부터 꾸역꾸역 학습지를 풀기 시작했다. 먼저 중고서점에 책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언젠가 이사할 때 잔뜩 정리한다고 정리했었는데도 야금야금 여기저기에서 산 책들로 다시 많아진 터였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과 소장하고 싶은 책들을 어렵게 골라내어 제외하고 책들을 정리했다. 여러 개였던 책장을 다 비워내고 책장까지 처분하였다.

그리고선 '나도 모르는 또 다른 내가 수집했었던 걸까' 싶게 엄청나게 많은 예쁘고 아름다운 수첩들과 노트들을 처분했다. 다시는 쓰지도 못할 걸 욕심내며 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다음으로 옷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낡은 것들, 오래된 것들을 골라 처분했다.


이제는 안 입는 옷들을 골라내 처분할 차례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안 입는 옷들을 골라내는 건 가능했지만 단호하게 그것들을 처분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몇 년간 입지 않은 게 확실했지만  앞으로 언젠가 입을 이유가 가득해 보였고 특히나 비싸게 산 물건은 입거나 착용하지 않더라도 계속 소유하고 싶었다. 버리거나 나누거나 헐값으로 팔려니 샀을 때 지불한 값이 생각나 그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나누기가 어려웠다. 고민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괴롭게 번거로웠다. 겨우겨우 마음을 내어 정리했지만 책들이나 다른 물건들과는 달리 여전히 필요 이상의 꽤 많은 옷가지들이 남아있게 된 이유다.

다시 겨울 옷을 정리하며 처분할 옷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니 그때의 괴로움이 떠올랐다.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정을 번복하고 다시 번복하고. 호기롭게 말을 뱉어놓고는 새삼 그 어려운 걸 다시 할 생각에 겨울옷 정리까지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다.


애초에 싼 물건을 샀었으면 내가 고통을 받지 않고 쉽게 물건을 정리할 수 있었을까? 물건을 버리려고 산 것이 아니므로 전제가 맞지 않지만 버릴 가능성을 염두해서 산다면 그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값싼 물건을 쉽게 사고 쉽게 버려버리는 환경 파괴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산 걸 버리는 일 없이 평생 늘 쓴다면? 그건 이미 비싼 물건을 살 때 스스로 쓰고 있는 핑곗거리는 물론이 거와 그런 야심 찬 포부와는 달리 평생 잘 쓰기보단 평생 잘 보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애초에 잠깐씩 빌려서 쓰면? 그러자 ‘뭐 굳이 귀찮게 빌려, 그냥 안 쓰고 말지’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고 보니 빌려서도 쓸만한 게 아닌데 정작 구입을 왜 했을까. 이제와 생각하니 물건을 산 이유가 흐릿하다. 기억은 사라지고 물건만 남았다. 그때 내가 그걸 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쉽고 서운했을까.


돈이란 어차피 언제나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므로 그걸로 물건을 사면 물건이라도 남는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실제로도 잘 산 물건들이 내 삶이 윤택하게 만들기도 했다. 필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도하게 존재하는 물건은 어차피 사라질 돈을 대신했다 할 지라도 존재하지 않는 게 낫기도 하다는 걸 정리하고 나서 알았다. 물건들이 차지하는 공간은 나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고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정신적 공간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물건들을 정리하니 공간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 이런 진리를 안다고 해도 옷가지들에서만큼은 처분하기가 어렵다.

문득 다른 사람들의 물건들이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물건을 소유하며 어떤 이유로 물건을 비워낼까. 나처럼 버리는 것이 어렵고 망설여질까. 그럴 땐 어떻게 결단을 내릴까. 그래서 곁엔 무엇이 남았을까.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그리고 부지런하게 정리를 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빈 공간이 주는 여유와 기쁨이 나를 응원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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