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연주 Mar 31. 2020

에스프레소와  이탈리아

Forza Italia!

친구가 새롭게 오픈한 레스토랑에 갔다. 예쁜 공간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마지막으로 디저트를 먹으면서 친구가 시킨 에스프레소를 나도 따라 시켰다. 작고 예쁜 잔에 담겨 나온 진한 갈색의 에스프레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의 이탈리아 친구들이 떠올랐다.


이탈리아 친구들은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 시모네는 나를 광장의 카페에 데려가 시칠리아식 아침으로 그라니타와 빵을 먹고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시칠리아 어느 산과 바다로 소풍을 갈 땐 조르다나와 다니엘과 광장에서 만나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출발하거나 산 꼭대기에 있는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로마의 로베르타의 집에 처음 도착했을 때 로베르타는 나를 집 앞 카페로 데려가 웰컴 커피라며 에스프레소를 한 잔 사주며 환영의 인사를 해주었고 클라우디오, 발레리노, 프란체스코와 떠난 자동차 여행에선 피자를 먹고 주유소 휴게소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내가 한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 출근길에 잠시 들린 루카는 굿바이 인사로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갔다.

나도 친구들을 따라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시칠리아에서, 로마에서, 로베르타의 집에서, 다른 친구들 집에서, 거리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간혹 아침엔 카푸치노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으나 대체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늘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아침에 길을 나서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카페 바(bar)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휙 마시고는 출근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나도 종종 그들 틈에 서서 쓴 에스프레소를 휙 마시곤 이탈리아어 수업을 들으러 가기도 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떠나는 날 잠시 들려 굿바이 인사를 해줬던 루카가 3년 전 아주 추운 겨울에 한국에 놀러 왔었다.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 한국의 스타벅스에서도 루카는 어김없이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었다. 매장에 에스프레소 잔이 없었던지 큰 종이컵 바닥에 에스프레소가 찰랑찰랑하게 담겨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세계적인 커피 체인점인 스타벅스가 여태 이탈리아에 진출하지 못하다 작년 즈음 밀라노에 1호점을 열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스타벅스에서 다른 메뉴는 보지도 않고 에스프레소를 시켰던 루카를 생각하니 화려한 종류의 커피들이 가득한 스타벅스가 이탈리아엔 존재하지 않았을 만했단 생각이 든다. 그들에겐 커피는 좋은 원두로 만든 진하고 향긋한 에스프레소만 있으면 될 뿐이니까.


한 번 예외적으로 로베르타가 커피에 초콜릿과 우유를 넣는 모카커피를 마신 적이 있었다. 로베르타와 재작년에 런던에서 만나 짧은 여행을 했는데 어느 아침에 카페 메뉴판에 쓰여있는 모카커피를 발견하곤 반가운 목소리로 느닷없이 모카커피를 주문했다. 갑자기 모카커피라니. 로베르타를 아는 나도 의아했지만 로베르타를 모르는 영국인 종업원도 의아했는지 모카커피를 주문하는 게 맞냐고 재차 물어보는 것도 모자라 모카커피를 아냐고 물었던 것 같다. 로베르타는 물론 안다며 이탈리아인인 자기가 어찌 커피에 관해 모를 수 있냐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하곤 커피를 받아 마셨는데 한 모금 마시자마자  ‘연주! 왓 이즈 디스?’ 하며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알고 보니 모카커피를 자기가 늘 집에서 만들어 마시는 모카포트로 만든 에스프레소라고 생각하고 주문한 것이었다. 그때 로베르타가 지은 황당하고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로베르타는 로마의 집에서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었다. 그리곤 설탕 두 스푼을 듬뿍 넣고 휘휘 저어 마시곤 했다. 로베르타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나도 늘 아침마다 그의 커피를 마셨다. 매일 아침 커피를 얻어먹는 게 미안해서 앞으로는 내가 만들어주겠다며 에스프레소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일은 간단했다. 주전자처럼 생긴 모카포트는 몸통 중간이 분리가 되는데 아래쪽에 물과 원두 가루를 넣고 다시 조립해 가스불에 올려 끓이면 금방 짜잔 하고 에스프레소가 추출되어 올라온다. 로베르타가 알려준 그대로 원두와 물의 양을 맞춰 만들었는데 웬걸 전혀 다른, 맛이 없는 커피가 탄생했다. 로베르타의 원두와 로베르타의 모카포트와 로베르타의 물로 만든 것이었는데 로베르타의 손맛은 따라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닌지, 내가 만든 커피는 너무 달랐다. 같은 재료라도 이탈리아 사람이 만들어야 맛있는 커피가 나오는 거냐며 서로 깔깔거리곤 결국 내가 떠나는 날까지 로베르타가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로베르타가 만들어 준 에스프레소와 아침


에스프레소를 보며 떠오른 이탈리아의 추억에 마음이 따뜻해지다 이내 곧 무거워진다. 따사로운 햇빛과 즐겁고 유쾌한 사람들이 있는 그곳은 지금 코로나로 큰 타격을 받고 있는 나라 중 한 곳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나쁜 소식이 우리나라에도 계속 전해지고 있다. 다행히 아픈 친구는 없었다. 다만 모두가 한 달 넘게 집에서만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야외에 있는걸 누구보다도 즐기는 그들이 집안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와인을 즐기며 인당 피자 한판을 먹고 누구나 자기만의 레시피로 파스타를 뚝딱 만들어 낼 줄 아는 그들.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티라미수와 젤라또를 먹는 그들. 늘 늦은 저녁에 식사를 하고 여름의 밤엔 로마의 트라스트베레 가득 메우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언제나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반갑고 아쉬워 꼭 끌어안고 볼 키스를 나누는  정다운 그들.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이탈리아의 모두가 안전하게 이 난관을 잘 극복하길 기도해본다.


포르차, 이탈리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