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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연주 Apr 15. 2020

반짝반짝 빛나는

好梦

중국 음식을 먹을까 싶어 침대에 누워 인터넷으로 레스토랑을 뒤적뒤적 찾아보다 문득 보통의 중국음식이 아닌, 그 맛이 그리워졌다. 수년 전 S와 중국에서 먹은 그 빨갛고 진한 맛.


배우인 내 친구 S는 어떤 때는 드라마나 영화 미팅을 하러 어떤 때는 어학연수를 하러 어떤 때는 촬영을 하러 한동안 중국에 갔다. S가 일을 하러 잠시 며칠을 다녀오든 공부를 하러 몇 달을 지내든 촬영을 하기 위해 더 긴 날들을 지내든 나는 종종 그가 있는 중국에 가곤 했다. 중국이 궁금해서, 재밌어서, 친구가 보고 싶어서, 심심해서, 마음이 복잡해서... 그때그때 여러 가지 이유로 베이징과 수저우 그리고 다시 베이징에 갔다. 그때마다 S는 스케줄을 위해 중국에 가서 머물고 있음에도 늘 나의 방문을 챙기고 여기저기 나를 동행해주었다.


내가 처음 베이징에 방문했을 땐 S가 막 중국 활동을 시작하려 여러 가지 미팅을 다닐 때였다. 미팅이 없는 날엔 S의 회사에서 S와 나를 챙겨주었다. S의 회사 대표는 우리보다 나이가 서너 살 많아 우린 그를 챈챈언니라 불렀다.


챈챈언니는 우리를 마라롱샤의 거리에 데려갔다. 마라롱샤는 ‘마라’라는 빨간 향신료로 볶은 민물가재 요리였다. 비닐장갑을 양손에 끼고 껍질을 발라내 한입에 넣어 먹으면 알싸하게 매운 마라의 향과 맛이, 짭조름하고 탱글탱글한 가재살과 함께 입 안에서 굴러다녔다. 살을 바르는 과정이 퍽 까다로운데 비해 발라내어지는 살은 적어  먹는 것이 꽤나 번거로웠지만 처음 먹어보는 제대로 된 마라향에 이끌려 계속 손이 갔다.


그 뒤로 중국에서 중국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진하고 빨간 마라를 종종 만났다. 한국의 명동과 같다는 관광 거리의 생선볶음집에서, S의 같은 소속사 배우의 생일파티의 큰 원형 식탁에 올려진 오리혀 튀김과 같은 요리들에서, 가면을 몇 개나 벗는지 모르는 사람의 공연을 보여주는 훠궈 집에서, S의 친구가 데리고 간 뜨거운 아이스크림을 파는 딤섬 식당에서, 수저우의 대형 쇼핑몰에 어느 음식점에서... 여러 형태의 음식들과 함께 진한 마라를 만났다. 먹다 보면 혀가 사라진 것 같이 입이 얼얼해지고 얼얼하다 못해 시원하게 매운 그 맛. 나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한국의 그 어떤 중국집에서도 그 마라의 맛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 맛은 내 친구 S와 함께 하는 중국에서만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설령 다른 곳에서 같은 마라 맛을 낸다고 해도 나는 S와 함께 중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눈치 채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마라의 맛보다도 그 시간들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2015년의 늦봄, 2016년의 가을 , 2017년의 한여름....  


잠깐의 날들이었지만, 하나하나 잊을 수 없는 순간들로 가득한 그 날들. 베이징의 큰 호수를 주욱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차를 마셨던 일, 인력거를 타고 해가 지는 수저우의 전통 거리를 따라 달렸던 일,  중국에서도 손에 꼽힌다는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한가로이 돌아다닌 일, 밤거리에 자전거를 타고 모기에 쏘이며 요가 수업에 갔던 일, 마사지를 받고 싶었는데 말이 안 통해서 둘이 멀뚱멀뚱 앉아 족욕만 오래오래 하고 온 일... 소소하고도 새롭고 소중하고 재밌던 순간들이다.


수저우의 정원에서. S


수저우에선 잊지 못할 멋진 서점을 가기도 했고 베이징에선 서점을 찾지 못해 낯선 동네를 한참 걷기도 했다. 나란히 엎드려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친구의 촬영장에 쫄래쫄래 따라가 친구가 분장을 하고 촬영을 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베이징의 한산한 빌딩 숲 사이에 앉아 바람을 솔솔 맞으며 커피를 마시기도 수저우의 연꽃이 둥둥 떠있는 큰 연못 앞의 커피숍에서 흔들리는 연꽃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베이징 외곽의 어마 무시하게 큰 야외 세트장을 구경하러 가는 길에 들린 체리 밭에서 체리를 따고 놀기도 하고 또 말로만 듣던 나시를 입고 배를 드러내거나 상의를 탈의한 중국 남자들이 앉아있는 도시 변두리 음식점에서 챈챈언니의 가족들과 소속 배우들과 둘러앉아 이름 모를 중국 음식들을 먹기도 했다. 목욕탕 타일 같은 작은 타일로 벽과 바닥과 의자까지 둘러놓은 곳에서 엄청나게 진한 녹색의 물고기들을 큰 가마솥에 마구 넣고 그 가마솥 안쪽 벽에다가는 찐빵을 붙여 구워 먹기도 했다. 친구의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댄스 수업에 참관해 땀을 뻘뻘 흘리며 힙합댄스를 추기도 했고 베이징 커피숍에 늦은 시간에 앉아 마침 베이징에 온 우리의 중국어 과외선생님한테서 중국의 무서운 귀신 이야기를 듣다 눈물이 쑥 나오기도 했다.


하나하나 나열하기에 모자란 소소하고도 강렬한 그 시간들.


중국에 한한령이 내려진 뒤로 친구는 당분간 중국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 시간 동안 우리의 삶은 또 다른 형태로 계속 나아가고 있는 중이기에 언제 다시 그 친구가 중국에 가서 일하고 내가 그곳을 놀러 갈 시간이 돌아올는지 기약 없이 느껴진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어젯밤에 꾼 꿈 같이 생생하고도 아득하다. 꿈을 꿀 때는 몰랐지만 깨고 나니 그때, 참 소중하고 즐거웠다. 꿈속에서는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지만 꿈을 깨보니 그 고민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그저 우리는 꿈속에서 참 빛나고 있었다.


삶은 자꾸만 바뀌고 자꾸만 흘러 지나가는데 그 안에서는 모르고 있다가 지나고 나서야 빛났던 날들임을 깨닫게 된다. 역시나 지금도 빛나는 날들임을 나는 시간이 흐르고 지나고서야 깨닫겠지.


중국에서 돌아온 S와 나는 한국에서 또 다른 빛나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 어느 시간이든 우린 빛나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언제나처럼 지난날들과는 다르겠지만, 지난날들과는 다른 색이겠지만 그 또한 반짝반짝 빛나는 하오몽(好梦)같이 아름다운 시간을 말이다.


수저우의 전통 거리


好梦

好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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