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훈 트리오 Gershwin Songbook - 공연 관람 후기
강산이 변하는 세월, 10년이 지나서야 "다시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라는 강렬한 열망이 나에게 생겼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는 유명한 말을 떠올리며 나는 어느덧 다시 피아노를 치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있다. 초등학생 때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하이든의 소나타로 콩쿠르에 나갔던 경험이 있다. 그 당시에는 피아노의 진정한 매력을 모르고 그저 연주한다는 행위 자체에만 몰두했던 시기다. 허나 세월이 흘러 나의 시각과 청각을 자극한 명작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에서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이 함께 재즈를 음미하는 재즈바에서의 장면이었다. 히사이시 조의 '인생의 회전목마'를 들으면서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어우러지는 피아노의 선율이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었다. 적어도 두 노래를 듣고 있으면 피아노가 주는 행복과 형용하지 못할 웅장한 감정이 내 온 감각을 휘두르는 건 분명했다.
그리하여 강재훈 트리오가 조지 거슈윈의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며 재즈 공연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오감 세포들은 조용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번 공연은 "Gershwin Songbook" 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재즈 명반 중에서도 비루투오소 재즈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이 남긴 1959년 동명의 작품을 모티브로 하여 기획됐다고 하니, 공연의 독창성과 매력을 미리 예감할 수 있었다. 당장 예술의 전당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마땅하다는 결심이 섰다. 지금 피아노를 배우고 있으니 피아노 연주의 즐거움과 기쁨을 그 어느 때보다 물씬 느끼고 있고 나의 손과 발이 이끄는 대로 시시각각 다채로운 선율과 음들의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래서 무언가에 이끌린다는 것은 중력 법칙과도 같은 것. 아주 오랜 세월부터 재즈를 사랑했던 나의 어머니와 우연히도 재즈의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된 딸이 또다시 3호선을 타고 그곳으로 간다. 두 모녀가 한 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밤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화창한 하늘 아래로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의 시원함을 느끼며 배부르게 꿔바로우와 간짜장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넉넉해진 속에 사뭇 흐뭇함과 행복을 느끼며 리사이틀홀로 부지런히 들어간다.
공연을 보러 들어갈 때는 미처 '조지 거슈윈'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전 다시 차분히 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니 연이어 조용히 감탄했다. 38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나, 생전 대체 불가능한 업적과 기록을 세우며 자신의 실력으로 20세기 초반을 장악한 사람, 조지 거슈윈. 그의 업적은 너무나 화려해서 이 글에서 다 나열할 수도 없다.
그래미 어워즈 공로상, 퓰리처상 특별감사상,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모두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17살 때 첫 자작곡 'Since I Lost You'를 발표한 이후, 21세에 '스와니(Swanee)'를 공개해 100만부의 악보가 팔렸다. 1924년, 거슈윈은 재즈풍의 관현악 작품을 의뢰받은 후 5주만에 세상을 놀라게 했던 대표작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했다. 뉴욕 교향악단은 조지 거슈윈의 재능을 이미 알아본 후 협주곡을 부탁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은 그에게 대형 재즈 오페라 작곡을 의뢰했다. 조지 거슈윈은 한 마디로 클래식, 재즈, 뮤지컬, 오페라 등 현대음악사에서 예술성과 대중성면에서 모두 성공한 음악가이자 작곡가다. 그가 뇌종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뜬 것을 생각하면 음악계의 거장과 너무 이른 시간에 작별했다는 안타까움이 든다.
다시 공연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리사이틀홀에서 배정받은 좌석은 BOX석이었다. 계단으로 올라가 좌석에 앉으니 연주자들을 대각선 윗방향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거리였다. 무대 기준 왼쪽에 앉은 강재훈 피아니스트는 공연 내내 뒷모습만 보게 되었다. 베이시스트 박진교와 드러머 최무현은 얼굴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지 거슈윈의 음악도 처음이거니와 세 사람의 연주도 난생 처음 듣는 날이기에 마음 속에는 한가득 기대감과 호기심이 피어났다.
이윽고 정시가 되자 세 사람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빈 공간이 세 연주자의 기운으로 가득 채워진다. 첫 음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은 관객도 떨리는 법이다. 피아니스트 강재훈은 연주를 바로 시작하지 않고 앞으로 나올 곡들에 대해 짤막한 소개를 해주었다. 몇 년도에, 어떤 배경으로, 왜 이 곡이 탄생했는지를 말이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곡가 조지 거슈윈의 영원불멸한 곡들을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연주로 접하는 것은 꽤 특별한 시간이었다.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드럼이 부드러운 춤을 추듯 서로 한 데 섞여 조화를 이루고, 또 각자만의 개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을 매분 매초마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감미롭고도 힘 있는 타건으로 우아한 재즈 피아니즘을 보여준 강재훈 피아니스트, 안정적이면서도 다채로운 베이스라인을 선보이는 박진교 베이시스트, 놀라운 강약조절로 섬세함과 강렬함을 모두 표현하는 최무현 드러머가 만드는 색깔은 너무나 다채로웠다. 거슈윈 작품의 낭만과 깊이를 다양한 곡들로 느낄 수 있었고 재즈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우선 공연 내내 강재훈 피아니스트의 뒷모습만 본 관객으로서, 오히려 그와 동일한 시야로 피아노를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오히려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박스석이 가장 좋은 환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피아노 건반으로 빨려들어갈 듯이 열정적으로 고개와 몸을 숙이며 연주하는 강재훈 피아니스트를 보며 뜨거운 열정과 정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피아노 건반을 치는 하나하나의 손길에서는 섬세함과 대담함이 동시에 묻어났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선율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 자신감이 물씬 드러났다. 피아노 솔로에서는 거침없이 독보적인 음색과 선율을 자랑하면서도, 트리오와 함께 연주하는 구간에서는 그들과 대화를 하듯 정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베이시스트 박진교는 무대 한 가운데서 그야말로 '베이스'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한국의 론 카터로 평가받는 그는 시종일관 팽팽한 줄다리기와도 같은 콘트라베이스의 현란한 음을 모두 소화했다. 양손의 손가락이 한 치의 쉴틈도 없을 정도로 공연 내내 위 아래로, 옆으로 현란하게 오가는 것을 보며 그는 진정한 프로이자 마스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공연에서 굉장히 인상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드러머 최무현의 역할이었다. 막대기 아래 부드러운 솔같은 도구로 드럼의 겉면을 원을 그리며 연주하는 것이 공연의 시작이었는데, 이러한 모습이 나에게는 생소했다. 그는 한 자리에 앉아 여러가지 스틱을 바꿔가며 곡의 분위기와 특성마다 확연히 다른 소리를 내어가며 연주했다.
드러머 최무현은 특히 두 번의 솔로 파트에서 보여준 퍼포먼스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다른 곡들에서는 트리오 사이에서 바다와 대지같은 역할을 했다면, 솔로 파트에서는 마치 웅장한 암석 또는 산처럼 대비감이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마치 멈추지 않는 경주용 레이싱카처럼 드럼의 비트가 쉬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갔고, 두 손 두 발은 거의 신들린 마냥 일체가 되어있었다. 파워풀한 그의 연주가 끝나자 모두 약속한 듯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공연이 끝난 후 리사이틀홀을 나오자 어느새 깊은 밤이 예술의 전당을 감싸고 있었다. 강재훈 트리오의 환상적인 연주를 보고 나온 뒤라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온 감각을 들뜨게 하는 트리오의 스윙감, 피아노-베이스-드럼의 인터플레이, 놀라운 즉흥 연주를 모두 경험하니 재즈 피아노의 세계를 넘어 '트리오'만이 보여주는 매력에 흠뻑 젖어들었다. 이번 공연은 '스트레이트 어헤드(Straight ahead)라는 미국 정통 재즈 스타일과 형식을 그대로 계승했기에 재즈 입문자로서도 재즈의 뼈대를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강재훈 트리오가 선보인 이번 공연은 내게 재즈의 '시작'이 될 것만 같다. 다가오는 가을과 겨울에도 강재훈, 박진교, 최무현 트리오가 보여줄 재즈의 본질을 만끽하러 어디론가로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