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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rrr Feb 12. 2021

설날필수질문에 찐으로 대답하기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짱구 같은 내 인생

민족의 대명절, 설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필수질문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그칠 줄 모르는 코로나의 기세 덕분에 올해는 아무리 제사에 미친 집안일지라도 모이지 않기로 했다. 다만 아예 스킵하진 않고 5인 미만의 주요 어른들만 모여서 차례를 지내기로 했다.(그렇다. 진짜 제사에 미친 집안이다!ㅋㅋㅋㅋㅋㅋ)


TMI를 더하자면 나는 대유교 집안의 K-장녀이지만 어릴 적부터 성질머리가 괴팍하고 똥 손이었으며 모두 줄줄이 외아들만 낳던 중 유일한 여자아이로 태어나 나름 귀한 대접(?)을 받았다. 덕분에 (그렇게 줄줄이 아들들만 낳아도 여전히) 귀한 아들과 마찬가지로 부엌 출입은 하지 않은 희귀한 K-장녀로서 이번 이벤트에 빠질 수 있었다. "아니 이런 K-장녀(물론 차녀는 없읍니다... 원앤온리 미me 뿐임)가 어딨어?!"싶을 수 있으니 한 가지 썰을 더해보겠다.

9살 추석 때 처음 부엌에 불려 갔다. 송편 만들어 보라기에 고사리 손으로 나름 작품을 만들어 냈더랬다. 그러자 "이렇게 못 생기게 만들었으니 나중에 못 생긴 딸 낳겠네~"란 어른들의 놀림이 이어졌다. 날 때부터 승질머리로는 이 집안의 적통임이 분명했던 나는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내가 만든 송편을 돌팔매마냥 쟁반 위에 내던지고 쿵쾅거린 뒤 "다신 이런 거 시키지 마쇼!" 외치며 부엌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그 뒤로 여태껏 내가 명절날 부엌에 들어간 적은 제사음식 나를 때 빼곤 없다.

*리빙포인트: 싫어요! 의사표현을 분명히 강하게 하자.(폭력성을 띄면 효과만점★★★★★)


살면서 한 번도 나 같은 집안 분위기? 성장배경?을 가진 K-도터는 아쉽게도 (인맥이 좁고 얕은 터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명절마다 사회이슈가 되는 음식 준비, 집안일, 고부갈등 스트레스 등에 대해 (보고 들은 바가 많아) 보통의 여자 입장도, 그리고 그 입장이 되어 체감해서 아는 (보통의 딸이라면 이해 못 할) ^일부^ 남자 입장도 다 안다.

싱글일 때는 거실에서 별 재미도 없는 TV 보면서 뒹굴대느라 평생을 부엌에서 고생하는 엄마 못 본채(상 차리기도 안 돕고 설거지도 진~짜 엄마 아플 때만 ^도와^주고 심지어 후식 과일 깎기도 안) 하다가 결혼하면 갑자기 효자 되어 고생하는 우리 엄마 도와줄 (눈먼) 착한 부인 얻고자 하는 K-효자의 마음을! 나도 그런 남자 어른들과 아들 손주 틈바구니에 껴서 멀뚱히 앉아있다가 오니까ㅋ 설마 아직도 그런 집이 있어?라고 묻는다면 YES! 여기 아직 쥐라기 공원 공룡마냥 현존합니다요!

 

덕분에 난 매년 명절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나는 솔직히 K-효녀와 달리 엄마를 위해 부엌일을 같이 하지 않는 K-효자, 아니 불효자, 아니 때때로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깡패라 아무도 내게 '딸답기를' 강요하지 않아서 아들이랑 겸상하며 뒹굴거렸다지만, 일말의 양심이란 것이 있고 TV매체에서 그리는 그림을 보고 '딸이면 응당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군'이란 생각을 약간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만국 공통으로 언제나 흐린 눈 하는 것은 너무 편하고 달콤하지 않은가? 나도 이럴 때만은 트랜스아들이 되어 모른 체 한다. 일단 집안일은 너무나 육체노동이니까! 한식은 너무 손이 많이 가고 귀찮으니까! > 엄마가 고생하는 건 마음 아프지만 내 몸이 아픈 것도 슬프니까! > 내가 힘들면 우리 엄마도 슬퍼하니까!라는 환상의 삼단논법으로 난 또 모른 척 누워있고 마는 것이다.

괜히 20대 취준생 시절 같은 쭈구리 때 엄마가 고생하는 게 너무나 못 견디게 마음이 아파 괜히 부엌에 (무척 열정 없이) 얼쩡거리면서 "뭐 도와줘?"라고 물어봤자 "걸리적거리니까 나가 있어. 그게 돕는 거야."라는 답만 듣고 풀이 죽는다.(왜?... 도대체 뭘 했다고...?ㅋ) 이게 몇 번 되풀이되면 '아! 나는 부엌에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는 존재구나^^ 나는 어차피 부엌일은 할 줄도 모르니까^^ 엄마가 나가 있으라니까 나가 있어야지! 엄마 말씀 잘 듣어야지~~'라고 정신승리까지 하면 더욱 완벽해진다. 매년 그냥 그렇게 습관처럼 뒹굴거리거나 혹은 차마 맨눈으로 엄마 고생하는 걸 볼 자신이 없어 집을 나가 근처 PC방을 배회하거나 같은 불효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패턴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눈에서 멀어지만 고통도 멀어지니까,,^^ㅎ

그러다 명절 당일 아침엔 괜히 차려입고 부엌과 제사상 사이에서 쟁반 몇 번 나르고 '아! 나 일 좀 했다^^'라고 뿌듯해 한 뒤, 엄마를 갈아 만든 각종 전, 갈비찜, 잡채, 떡국 등을 배 터지게 먹으며 "역시 엄마 음식이 최고야! 사 먹는 건 속 더부룩해지고 별로~"를 칭찬으로 곁들이면 내 K-효자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심지어 이 루틴에서 나는 여자라 (21세기에도 이어지는 대유교 집안의 국룰!) 차례나 제사 지낼 때 절을 하는 등의 참여도 못 한다. 절할 아들들이 너무 많아서...ㅋ 정말이지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서 멍하니 있다 올뿐이다.

그나마 최근 나의 역할은  결혼  하냐고 잔소리 듣기? 이 역할마저 없었으면 난 유령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내 바로 위의 사촌오빠가 최근에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고 아이까지 후딱 낳아버려서(마음씨 좋고 예쁜 K-싱글녀들이 세상엔 아직 참 많습니다...) 이제 나는 온 집안에서 물어 뜯기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이다.


이번엔 모이질 못하니 좀 넘어가나 싶었건만 주요 5인에 발탁되어 큰집에 다녀온 엄마를 통해 또 잔소리를 들었다. 뭐 어른들은 맨날 하시던 말씀 안 하시면 오히려 위험한 거니까 변함없이 하셔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부엌일은 이젠 며느리들이 거진 다 하니 엄마는 손이 좀 덜었다고 하는데(도대체 왜 후손한테 도움도 안 주는 남의 집안 귀신밥 차려주느라 귀한 며느리들 고생이여) 왜 딸내미 시집 안 가는 것마저 엄마 탓을 하는 건지? 지겹다,,, K-남탓,,,! 문제가 있다면 결혼 못 한 본인(나)에게 있는 거지 그것이 왜 부모탓이여?! 물론 제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도 딱히 아닙니다만.



남자친구는? 연애 안 해? 결혼 안 할 거야?

왜? 네 나이가 몇인데 부모님 속 그만 썩이고

아무나 만나 일단!



명절필수질문은 항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이제 도가 텄기 때문에 별로 짜증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따금 질문하시는 본인들도 각자 나름의 가정사가 있고 심지어 이혼도 한 분들이 내게 그런 질문을 더욱 지겹게 던지는 게 아이러니해서 웃음을 참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럼 좋은 분 소개부터 시켜주세요~!"하고 넉살 좋게 웃어넘기지만, 속으로는 '나도 어디서 눈멀고 착하고 우리 엄마 대신 집안일해 줄 예쁜 남편 있으면 당장 잡아다 우리집 귀신 될 때까지 으데 감히 이혼 꿈도 못 꾸게 가스라이팅해서 잡아 놓고 갓 지은 뜨끈한 쌀밥에 10첩 반상만 매일 만들게 시킬 텐데,,, 쩝. 청소랑 빨래 집안일도 잘하는 손끝이 야무진 그런 귀한 분을 아직 못 만나 결혼을 못 하고 있습니다만? 물론 이제는 여기에 서울에 최소 방 두 칸 이상의 자가 혹은 전셋집 해올 수 있는 능력남에 조상 대대로 탈모도 없어야 하고 웅앵웅앵...'하고 대답해버리고 싶다. 물론 이게 제 본심이거나 저희 집안 사상은 아닙니다만은...?


농담은 거두고 찐에 찐으로는, 나는 이런저런 조건들을 들어가면서까지 사람을 골라 만나서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들고 거기 구성원으로서 응당 기대되는 역할을 할 자신이 없다. 누가 우리 집에 와서 고생하는 것도 싫고(지금 며느리들이 고생하는 것도 싫지만 내가 시어머니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니 무슨 권한이 있겠나...라고 또 정신승리) 내가 남의 집에 가서 고생하는 건 정말 더더욱 싫다. 왜 이렇게 지지고 볶으며 사는 일을 대를 이어 계속해나가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내가 이 성질머리에도 범죄를 안 저지르고 굉장히 평온하고 평탄하고 편안하게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부모님 뽑기 운이 좋게 태어나서였을 뿐이다.(친척들은 TV 드라마에 나오는 흔한 캐릭터들이지만 내 부모님만은 오픈마인드의 심성 여린 분들이라 실드 쳐본다.) 하지만 이런 뽑기에도 안 좋은 점도 분명 있고(예를 들어 내 성질머리... 아빠는 가끔 넌 누굴 닮아 그러냐?라고 물으시지만 고개를 들어 젊을 적 거울을 보시오...) 그리고 뭣보다 나는 태어나져 버렸으니 살지만, 굳이 99% 뽑기운이 좋지 않을 것이 뻔한 어떤 생명이 나를 부모로 두고 내 자식이 되어 사는 고생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이것만은 엄마의 고생을 흐린 눈 하듯 하지 않겠다. 이건 적어도 내가 안 낳으면 일어나질 않을 일이니까!


위에서 농담으로 언급한 것이 아니고 진짜 내겐 인류애가 없다. 근데 친척들에게 "사실 제가 소시오패스라서요^^ 전 제 남편 될 사람도 제 애도 평생 사랑할 자신이 없답니다...ㅎㅎ"하면 부모님을 욕보이는 짓이니 그렇게 대답하지도 못하고. 허 참! 그냥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정상이란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딱히 우울증이 있거나 대인기피증이 있거나 살면서 어떤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 아니라 내 성향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건 평생을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냥 타고난 것 같다.

이런 얘기를 부모님에게 하면 가끔은 상처 받으실 때가 있다. "내가 너 키울 때 뭐 잘못했니? 부족했니?"라고 진지하게 되물으시면 "아뇨. 너무 충분해서 그만큼 내가 또 누군가에게 도저히 해줄 자신이 없어서 그래."라고까지 답하면 진짜 상처 받으실까 봐 그냥 부모님 3년상 치를 때까지만 열심히 살겠다고 대답하고 만다. 물론 이 말조차 상처 받으시지만. 하 인간이란,,, 너무 쉽게 상처 받는 피곤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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