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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모기 Mar 06. 2021

사람은 많고, 신자는 적다

이달의 영화 네 번째 시리즈: 얀 코마사 감독의 <문신을 한 신부님>

이 글에는 영화 <문신을 한 신부님>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모세의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깨뜨리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그들의 말씀을 깨뜨리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복음 5:17) 산상수훈을 마친 예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권위자였던 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종교인 저격하는 말을 일삼았고, 신을 예배하는 신성한 장소인 성전을 갈아엎고, 어떠한 일을 해서도 안 되는 안식일 규정조차 지키지 않았다. (현대적으로 보자면 대통령과 국회의원 저격, 국회와 청와대 폭탄 테러 정도. 혹은 그 이상)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겉으로는 온갖 율법을 지키면서 실상은 본질을 잊은 종교인을 규탄하며, 동시에 그들이 진심으로 믿고, 그 믿음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기를 바랬다. 2000년이 지난 지금 변한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의 믿음은 다시 그때로 돌아갔을까.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규정에만 목메는 기독교인의 비상식적인 행동과 종교 지도자의 부패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그들 중에는 아직도 자신이 신을 믿으니, 자신의 모든 일이 선할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안타깝게도 영화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런 통념에 착실히 부합한다. 대부분의 주민은 매주 성당에 나오지만, 주임신부의 말처럼 사람은 많고 신자는 적다. 아직 그들에게 신을 믿는다는 건 현실 도피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보험 정도이다. 신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처음 다니엘을 만나는 자리에서부터 같이 헌금을 세자고 부탁하는데 이 장면은 종교의 세속화라는 감독의 메시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다니엘의 등장으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훔친 신부복 덕에 얼떨결에 신부가 된 다니엘은 알코올중독 치료를 위해 잠시 마을을 떠난 주임신부를 대신해 성당을 맡게 된다. 


 배운 적도, 해본 적도 없는 종교 일이 하루아침에 다니엘에게 주어진다. 신부를 꿈꾸긴 하였으나 그에게 경험이라곤 소년원 시절 토마스 신부의 미사를 옆에서 도왔던 기억뿐이다. 성당 관리인을 포함하여 인터넷과 전문 서적의 도움도 받아보지만, 한순간에 범죄자가 신부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덕분에 마을이 유지해왔던 기존 방식은 전부 허물어진다. 예배의 분위기와 기도의 방식은 물론이고, 고해성사하러 온 여성에게 죄를 용서해주기는커녕 아이와 놀아주라는 뜬금없는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이 확실하다. 하지만 종교가 본질을 잃고 도식화된 마을 속에서 다니엘의 무지는 ‘단순한 믿음’으로 치환된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로마 지휘관을 향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말한다. 유진 피터슨이 편집한 메시지 성경의 경우, 이를 단순한 믿음이라고 표현했다.)  


 그 지점에서 마을 사람들과 다니엘의 본질적 차이가 발생한다. 다니엘은 종교 자체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지만, 그 본질이 되는 예수의 말을 ‘문자 그대로’ 행하는 인물이다. 극 중 자신의 대사처럼 그에게는 어디서 왔는지(주여 주여 하는 자)보다 어디로 갈지(뜻대로 행하는 자)가 중요하다. 그는 성당 안에만 갇혀있던 믿음을 마을 사람들의 삶 안으로 전파한다. 고해성사에서 아이와 함께 놀아주라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가족에게 분노와 억울함을 표출시키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마을 청년들과 함께 술, 담배를 즐기며 이야기 나누는 장면은 예수가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함께 밥 먹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당시 종교인은 예수를 맹렬히 비난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니엘도 이 과정을 통해 마을 안에 깊게 뿌리박힌 집단 트라우마를 이해하게 된다. 다니엘의 노력으로 서로를 외면했던 종교의 영역과 삶의 영역이 교차하며 공통분모가 생겨난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아직 마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 삶의 영역, 과거 사고로 인한 집단 트라우마가 남아있다. 이 사건을 겪은 마을 사람들은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 우리와 너를 구분하는 기준을 세우고 이를 철저히 이행한다. 종교의 영역과 삶의 영역을 완전히 하나로 포개어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결정적인 도약이 필요하다. 엘리자가 다니엘에게 희생자로 지칭되었던 아이들이 사건 당일 술과 약에 취해 있는 영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결정적이다. 앞서 세워졌던 공동체의 기준은 진실 관계를 떠나 그저 다수의 만족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순간 선의 옷을 입고 있지만, 실상은 타자인 다니엘이 또 다른 타자 과부에게 연민을 느낀다. 여기서 연민은 진실을 알고 없고의 문제를 넘어서 오직 그가 타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다니엘은 주임신부가 지키지 않았던 과부와의 약속, 남편의 장례를 치뤄줌으로 마을을 덮고 있는 거짓 기준을 무너뜨리려 한다. 


 하지만 변화의 움직임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은 마을의 평화와 회복을 얻기 위해서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소년원 동기는 그 사실을 침묵하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지만, 다니엘은 장래 비용을 위해 돈을 주지 않는다.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배반자 유다에게 넘겨준다. 그 결과, 소년원의 토마스 신부에게 발각되고 만다. 다니엘은 그의 마지막 미사에서 자신을 포장해왔던 신부의 옷을 벗고 문신과 상처가 담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예상대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당혹감과 실망, 그리고 배신감과 경멸이다. 이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눈빛과 닮아있다. 이때 카메라는 한없이 낮아져 다니엘을 우러러본다. 팔을 벌린 그의 자세와 이를 담는 로우 앵글은 사람들이 성당 앞에 걸려있던 예수상을 바라보던 시선과 유사한데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다니엘과 예수를 동일화시킨다. 


 소년원으로 돌아오게 된 다니엘 앞에는 그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 보누스의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원한 관계는 영화 시작 이전부터 존재했기에 그들이 왜 다투는지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아무런 이유가 없는 쪽에 가깝다. 그저 자신을 스스로 핀스헤르에게 넘긴 다니엘의 인과응보이다. 이는 예수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목적은 있었지만, 그에게 그 일을 행해야 할 근본적 필요조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희생으로 인해 인간은 영원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었다. 다니엘의 희생 덕에 마을에도 회복의 기회가 찾아온다. 사고 이후로 집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과부가 미사에 찾아오고, 그녀를 증오하던 성당 관리인은 그녀를 맞이한다. 감독은 다니엘이 보누스에게 맞는 장면과 마을의 미사 장면에 교차 편집을 사용하여 희생과 그 대가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드디어 마을 사람들의 종교와 삶이 하나로 포개어진다. 


 이 영화는 기독교의 신앙을 다시 정의하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다 잊어버린 믿음의 본래 정의를 환기하는 영화다. 신앙은 본래 삶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 너무나 당연해서 대개 다들 잊어버렸고 이제는 오히려 변질하여버린 예수의 본래 가르침을 다시 한번 호소한다. 이 영화를 보러 온 많은 종교인이 성스럽고 은혜로운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 당황했다 한다. 하지만 이처럼 기독교적인 영화가 어디 있을까. 예수가 처음으로 전한 말은 이러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4:17)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이를 고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알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영화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각자의 선의 기준이 있지 않은지. 그것이 과연 예수의 가르침을 위한 것인지, 자신을 보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인지. 여전히 이 영화가 기독교적이라 인정할 수 없다면 그건 영화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문신을 한 신부님> 스틸컷, 네이버



  


- 이 글은 신형철 평론가께서 한겨레 21에 게재하신 ‘시를 쓰는 사람은 많지만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글의 흐름뿐 아니라 문장 자체를 가져온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평론가님의 팬으로써, 그리고 영화인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평론가님이 영화를 보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방식을 배워보고자 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밑에 기재된 링크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원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본 링크: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3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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