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밟은 곳만 따라오렴
정방폭포는 바위들을 밟고 접근해야 폭포에 가까이 갈 수 있는데, 원체 운동감각이 없는 데다가 임산부인 나는 중간 즈음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 멀찍이 폭포를 바라보기를 택했다.
남편 없이 혼자 여행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도 우연처럼 필연처럼 종종 듣게 된다. 그리고 나의 쉼터가 되어준 바위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많은 가족들에게서 인간군상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딸, 아들이 함께 여행 온 가족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는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딸에게 계속해서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평평한 곳을 밟으라고! 엄마한테 기대지 마! 지만 살려구 아주.. 그래, 너 혼자와!'
딸은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칭얼거리면서도 엄마 목에 매달리며 엄마를 적극 의지하려고 했다.
엄마는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딸에게 독립성을 요구했고, 결국 딸은 엄마 손을 놓고 제 살길을 찾아 아슬아슬하게 발을 내디뎠다.
마지막으로 지나간 가족은 엄마, 아빠, 아들, 딸이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막내딸의 손을 잡아주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밟은 곳만 차근차근 따라와. 천천히 조심조심.'
아빠는 딸의 뒤에서 근접거리를 유지하며 딸이 잘 가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딸은 엄마의 발걸음에 집중하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고, 엄마는 가끔 뒤를 돌아보며 딸의 균형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땅콩이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 줄 것인가.
과연 나는 '엄마가 밟은 곳만 따라오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임신을 한 후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짙어졌는데(그럼 그동안에는 나쁜 짓을 많이 했다는 건가!!), 이번 정방폭포에서 바라본 다른 가족들의 독립성을 대하는 모습 또한 일맥상통하는 경험이었다.
물론 험난한 바윗길을 모두 통과한 후에는 모든 가족이 평화로웠다. 아이에게 잘 걷지 못한다고 화를 냈던 부모들도 당연히 자녀가 다칠까 걱정되어 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신경질임이 분명하다.
어느 부모가 자녀가 다치길 바라겠는가. 다만 부모의 그 예민한 성향이 자녀에게 전달되는 방법이 조금 다른 것뿐이다.
인간관계를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전달 방법이 아니던가. 같은 진심을 가지고도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그 결이 달라진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나도 조심해야지. 우리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을 걱정이라는 포장지에 쌓아서 잔소리로 폭격하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우리 땅콩이가 내 발자국을 따라서 한 발 한 발 걸어올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