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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DA Sep 25. 2023

오래 묵은 친구 J에게

묵히다: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기다

안녕 J.


우리 작년 겨울 즈음 마지막으로 보았지.

날 보며 즐거워하고 더 예뻐졌다며 칭찬하는 너를 나는 왜 비뚤어진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내가 그동안 너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왔길래 오늘 그저 평범한 내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싶었어.


이상하지. 말은 듣는 사람의 것이기에 내 마음이 분명 너를 향해 삐딱하게 서 있었을 거야.


이런 내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나는 그날 저녁 다시 한번 너에게 텍스트로 연락했어.

그리고 나는 우리의 마음이 가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단다.


몇 년에 한 번 경조사 때 겨우 스치듯 보는 관계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들.

뜬구름만 잡는 대화들을 침묵들 사이사이로 주고받다가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며 끝을 맺었지.


그 뒤로 우리는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았어.


세월이 많이 흘러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과연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마음을 나눈 걸까.

자주보지 않아도 늘 어제 본 것 같은 사이니까,

어릴 때의 가정사와 아픔들을 다 아는 사이니까 굳이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언젠가부터 서로의 생일에도 형식적인 선물과 축하 덕담이 오고 가고,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선물들에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어. 적어도 나는 그랬어.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많아지니 나는 점점 그 자리가 불편해졌단다.

함께 있을 때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어.


글쎄, 너는 어땠을까.


그런 너를 만나야 하는 날이 가까워오네.

나는 괜히 새 옷이 사고 싶어졌어.

20년 지기 절친을 만나는데 새 옷이 사고 싶다는 건 그 자리가 꽤 공식적이고 대외적인 자리라는 의미잖아.

같이 여행 가서 쌩얼로 깔깔 웃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시간을 나누지 못하겠지.


가을벌레 먹은 잎사귀


너를 미워하는 건 아니야.

너의 삶의 사이클과 나의 사이클이 서로 맞지 않았던것 같아.

그러다 보니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고, 그렇게 마음이 멀어진 것뿐인데 누가 누굴 미워하겠어.

그저 우리가 노력하지 않은 시간들이 많아져서, 묵혀놓은 우정이 되어버린 게 슬프고 마음이 아프네.


그리고 이 모든걸 툭 터놓고 대화할 용기가, 혹은 의지가 내겐 더이상 없다는 거야.


생각해 보니 나는 이런 생각을 한 게 5년도 더 넘은 거 같아.

이미 끈을 놓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너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렇게 편지도 보내는 거겠지.

이번 만남에서는 너와 너의 친구, 그리고 내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아니면 서로의 마음의 결이 맞지 않는다는 걸 또 한 번 확인하는 기회가 될까.



J야. 그런데 나는 이번에도 희망을 가져봤어.

너의 인생 사이클이 나와 한 발짝 가까워지는 이 기회를 통해 우리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너랑 나는 제일 닮은 부분이, 서로에게 좋은 것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거잖아.

들으면 속상하고 별로인 이야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즐거운지 주로 이야기했지.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같은 사이클을 지날 때 가능한 이야기들이었어.

공부하고, 대학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그 사이클.

이제 그것이 비슷해져 가고 있으니 우리 다시 서로에게 온기를 내어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네 품에서 내가 울고, 내 품에서 네가 울었던 시간들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 이번 만남에서 부디 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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