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들과 각자 흩어져 옷 구경을 하던 중, 한 친구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야, 희라야. 여기 네 옷 있다.”
그 말에 웃음이 섞인 걸 보니 요란하거나 이상한 옷일 게 뻔하지만, 다 알면서도 속아주러 가본다. 웬일인지 멀쩡한 반소매 티셔츠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진노랑이네? 오, 괜찮은데? 하는 순간 친구는 히히 웃으며 티셔츠의 뒷면을 보여준다. 그럼 그렇지. 역시 또 체리가 그려져 있다.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뒤돌아선다.
“너나 입으세요.”
언젠가부터 나는 체리를 싫어했다. 먹는 과일로서의 체리 말고, 디자인 요소로서의 체리. 특히 옷이나 각종 인테리어 오브제에 활용된 체리 그림을 볼 때마다 불쾌해진다. 재질이 얼마나 좋든, 디자인이 얼마나 잘 빠졌든, 가격이 얼마나 합리적이든 상관없이 체리가 그려져 있으면 일단 무조건 탈락이다. 체리를 로고 디자인으로 한 브랜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심지어 많은 사람에게 오래전부터 사랑받아온 브랜드임을 뒤늦게 알고 충격을 받기도했다. 저렇게 촌스러운 걸 왜들 좋아한담.
너는 왜 그렇게 체리를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냥, 유치해 보여서. 그냥, 못생겨 보여서. 그냥, 거창한 이유는 없지만, 그냥, 싫다. 이유 없이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듯이 싫어하는 데도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이제는 ‘체리’라는 이름조차 싫어지려고 한다. 체리의 앞글자 ‘ㅊ’과 모음 ‘ㅔ’의 조합도 왠지 촌스러워 보이고, 뒷글자 ‘리’는 어감이 귀여운 척하는 것 같아 더 얄밉다.
그런데 얼마 전, 체리 타투가 내 오른쪽 팔등에 입주했다.
호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불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해진 세상이다. ‘오글거린다’라는 말이 사랑과 낭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가로막아버린 탓일까?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이 자기 자랑처럼 여겨져서일까? 삶이 하도 팍팍해서 사랑에 쏟을 체력마저 바닥나 버렸기 때문일까?
그런데 무언가가 싫다는 말을 반복하다 보면 어째서인지 그것이 더 많이 생각나고 그와 관련된 것을 더 자주 맞닥뜨리는 것 같다. 체리가 싫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다음부터는 체리가 그려진 옷이나 액세서리가 유독 눈에 띄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딴 걸 좋아하지?’ 하고 생각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어째서 인간은 자신이 싫어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될까? 과학 저널리스트 존 티어니(John Tierney)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부정성 편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정성 편향이란 뇌가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에 더 주목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오랫동안 영향을 받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부정성 편향은 생존 본능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그 덕에 인간이 각종 재해와 전염병과 같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원시 시대가 아니고 나는 밀림에 있지 않다. 현실에서는 부정성 편향이 별로 도움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지금 나는 누군가를 열렬히 증오하고 부정성 편향의 지배하에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몇 달 동안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던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이 체리보다 더, 아니 체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싫다. 왜 그렇게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그를 향한 내 마음도 마음대로 안 되고, 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대로 안 됐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언제나 나를 헷갈리게 만들고 힘들게 했던, 지독히도 사랑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10년 전 나의 첫사랑에게 술김에 연락을 했다. 미련이라기보다는 그냥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도 오래간만이라 번호가 바뀌었거나 나를 차단했거나 해서 답장을 못 받을 줄 알았는데, 1분도 안 되어 곧바로 답이 왔다. 왜 진작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그날부터 우리는 매일매일 연락을 주고받으며 함께했던 지난날들을 추억하고, 현재 일상을 공유했다.
어느덧 3개월이 지났고, 우리는 그간 몇 번의 즐거운 만남을 가졌다. 그사이 마음이 점점 커지게 된 나는 스무 살 때의 나로 되돌아가 온통 그 사람만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가능성을 점쳤다. 그 사람의 무엇이 그렇게 좋냐고 친구들이 물어올 때마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지만, 나는 그 사람의 눈빛, 성격, 말투, 향기, 취향, 목소리, 나와는 맞지 않는 부분들까지 전부 다 좋았다. 다시 말해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건 원래 불가사의한 감정이니까.
그러나 우리 사이엔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이 존재했다. 흔한 이별 사유이기도 한, 이동하는 데만 왕복 9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장거리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 사람은 내 마음을 알지만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를 도통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또다시 헷갈리기 시작했고, 쉽게 불안해졌다. 넘을 수 없는 높다란 장벽을 올려다보며 그 사람의 말 한마디에 혼자 울고 웃으면서 매일매일 감정의 널뛰기를 했다. 투명한 내 마음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모르는 척 애매하게 굴었다.
10년 전에도 본 적이 있다. 관계의 주도권을 쥔 사람의 여유로운 표정을. 그 끔찍한 기시감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대뜸 나는 그에게 우리 연애하자고 고백해버렸다. 진짜 사귀고 싶어서가 아니라 차이기 위해 고백을 한 셈이다. 가능성 없는 일에 일말의 희망조차 걸고 싶지 않아서, 이제 그를 그만 사랑하고 싶어서. 영겁 같은 하루가 지났고, 예상대로 나는 보기 좋게 차였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그의 모든 것이 싫어졌다. 그 사람의 거만한 눈빛, 재수 없는 성격, 촌스러운 말투, 퀴퀴한 냄새, 뻔한 취향, 답답한 목소리, 나에게 건넨 예의 없는 말들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길을 걷다 우연히 그 사람과 관련된 무언가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음이 깊었던 만큼 그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 사람을 증오하는 일이 진절머리가 나서, 제발 그의 모든 걸 잊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까지 했다.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도려낼 수만 있다면 시시포스의 형벌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차인 후 몇 주 동안은 시도 때도 없이 깊은 잠을 잤다. 원래 나는 친구들에게 제발 좀 쉬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못 견뎌서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언제나 바쁘게 움직이고 계획으로 꽉 차 있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에너지를 얻는 나였다. 그랬던 내가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날이 늘었다. 끼니를 거르는 게 습관이 되어서 꼭 맞던 옷이 널널해졌다. 내 방 천장 벽지에 미세한 무늬가 있었음을, 사람이 극도로 우울해지면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피폐해진 마음으로 지내는 동안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고 나만 힘들어진다는 걸. 내 마음만 아프고, 건강도 나빠지고, 해야 할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도 없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을 시간들을 불행하게 흘려보내게 된다는 걸. 그러니까 누군가를 미워해서 득이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칼을 거꾸로 들고 자기 자신을 찌르는 일과도 같았다.
그를 사랑하고 미워했던 수개월 동안 내가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그 사람보다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 〈서울체크인〉에서 영화감독 이옥섭과 배우 구교환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만약에 누가 너무 미우면 사랑해버려요.”
“맞아. 너무 미우면 그러는 게 마음이 편해.”
여기저기서 자꾸 눈에 밟히는 못생긴 체리가 하도 거슬리고 미워서, 이옥섭과 구교환의 말마따나 차라리 사랑해보려고 타투로 새겼다. 여태 의미가 있거나 좋아하는 것들로만 타투를 해왔던 나에게, 싫어하는 무언가를 타투로 남기는 건 잊지 못할 경험이자 도전이었다. 그토록 증오했던 체리가 나의 일부가 되다니. 작업실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가’싶었지만, 후회스럽다기보다는 긴장되고 들뜬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이제 나는 나와 평생을 함께하게 된 체리를 함부로 싫어할 수 없다. 체리 타투를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으’ 하고 인상이 찌푸려질 때면, ‘으-이구, 귀여워!’ 하고 황급히 속으로 되뇐다. 그런 나 자신이 어이없어 피식 웃고, 웃다 보면 그 말대로 체리가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올망졸망 동글동글 귀여운 체리.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로 체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증오하는 무언가를 사랑해버리는 건 정신 건강에 좋은 처방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 리스트에서 ‘체리’를 쓱싹 지우고 나니 꽉 찬 쓰레기통을 비운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이제 거기는 아무것도, 그 누구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다. 친구들이 “네 옷 여기 있다”며 체리가 대문짝만하게 그려진 옷을 보여줘도, 길을 가다 우연히 그 사람과 관련된 무언가를 발견해도 불쾌하지 않다. 누구도 미워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새긴 체리 타투 덕분에 비로소 나는 그를 마음의 바깥으로 영영 밀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가 그 사람을 다시 사랑할 일은 없을테다. 하지만 미워하기를 그만두면 그에 대해 끝없이 생각하는 일 역시 스스로 중단할 수 있음을 알았다. 증오하는 마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새로운 사랑으로 채울 수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그 어느 쪽에도 더 이상 그 사람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그를 완전히 지워버린 지금에서야 나는,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방법은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는 것임을 배웠다.
나는 내가 불호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직 사랑에만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쉽게 미워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사랑해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화내거나 슬퍼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내 마음이 절로 향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또한 영원한 숙제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