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 생각에 다시 잡은 붓이 준 뜻밖의 위로

틀려도 괜찮다, 다시 칠하면 그만이니까

by 해림

방학 중에 유화 그림 세 점을 완성했다.


그중 하나는 예전에 그린 것인데, 지금의 눈으로 보니 너무 엉망이라 새로 수정을 했다. 그동안 딱히 배운 것도 없건만 '저따위를 그림이라고 그렸나' 싶을 만큼 내 눈이 변해 있었다. 나머지 두 점은 미술 앱 ‘핀터레스트’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모방해 그렸다.


3년 전 교감 시절, 매일 늦게까지 학교에 매여 있는 게 힘들어 도망치듯 백화점 문화센터를 찾았었다. 야간자율학습 인원도 줄었고 부장 선생님들이 계시니, 굳이 교감까지 남아 감독을 감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는 칼퇴근을 해 문화센터로 달려갔다.


학창 시절엔 그림 꽤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유화는 서양화가들이나 하는 일이라 여겨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3년 전 비로소 캔버스와 물감을 샀다. 당시 강사는 딱 수강료만큼만 가르쳐주는 듯 말이 없었지만, 캔버스에 물감을 바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몇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게 유화와의 첫 만남이었다.


퇴직 후, 30년 넘게 문인화를 하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산더미 같은 유작을 정리하며 한동안 내 그림조차 증오하며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 여름방학, 구석에 박아둔 비싼 물감을 치우려다 문득 본전 생각이 났다. '이 물감만 다 쓰고 나면 절대 붓을 잡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예전에 그렸던 그림을 꺼내 몇 군데 수정해 보았다. 그동안 새롭게 배운 기술은 없지만, 예전보다 남의 그림을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된 나를 발견했다. 무엇보다 유화가 가진 특성이 내 마음에 쏙 든다.


'유화는 몇 번이고 수정할 수 있다.


다만 물감이 마를 동안에는 붓을 놓고 깊이 생각하며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성격이 급한 나에게는 이 기다림과 수정의 과정이 참으로 적절했다.


세상에 이렇게 여러 번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유화 말고 또 있을까 싶어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핀터레스트에서 찾은 그림을 보고 최대한 똑같이 카피하듯 그려보았다.


내가 봐도 몇 년 전보다 실력이 조금은 업그레이드된 듯 보였다. 이 정도면 굳이 더 배우지 않아도 되겠다 싶다. 그냥 내 마음대로 그려보고 싶다. 그리다가 마음에 안 들면 버리고, 다시 붓을 놓으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평범한 할머니에서 세계적인 화가가 된 '그랜드마 모지스(Grandma Moses)'처럼 되는 것은 사양하겠다. 76세에 그림을 시작해 101세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늘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76살이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천천히 하세요. 때로 삶이 재촉하더라도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내가 모지스 할머니처럼 그림 그리는 일을 진정으로 좋아하는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다. 학창 시절 그림 좀 그린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지, 그 기억을 모티브로 노년의 삶을 그림에 헌납하고 싶지도, 많은 작품을 남기고 싶지도 않다.


남편에게 새로 그린 그림을 보여줬더니 액자에 넣어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두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액자도 주문했다.


어쩌다 보니 작품이 벌써 여러 개다. 나는 이 그림들을 내 곁에 쌓아두고 싶지 않다. 훗날 내가 그린 그림들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작품처럼 누군가에게 '처분해야 할 물건'으로 취급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최초로 그렸던 해바라기 그림은 단골 미용실 원장님께 드렸다. 진회색 미용실 벽에 노란 해바라기가 멋진 대비를 이루고 있어, 손님들이 누구 작품이냐고 묻는다고 한다. 영업장에 해바라기는 재물을 불러온다더니, 마치 부적처럼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모양이다.


며칠 전에는 이번 방학 동안 확장 공사를 마친 행정실에 그림 한 점을 기증했다. '교장 선생님의 그림'이라며 대환영이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여기저기 용감하게 그림을 뿌리고 다닌다. 그래도 멀리서 보면 유화 물감 특유의 쨍한 색감을 즐길 수 있으니, 심심한 장소에 잠시 눈길이 머무는 볼거리가 되어주리라 자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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