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 현관문에 들어서니 마른 풀냄새와 매콤 달콤한 고추 향기가 온 집안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람은 간데없고, 베란다에는 누런 종이 부대 하나가 주인인 양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경북 봉화로 출장을 다녀온 남편이 모셔다 놓은 햇고추 20근이었다. 정작 남편은 고추 부대만 내려놓고 사우나로 도망치듯 사라지고 없었다.
남편은 공인중개사이자 ‘손해평가사’다. 대학 시절 재미 삼아 땄던 중개사 자격증을 책장 속에 썩히며 남의 회사에 청춘을 다 바치더니, 늦깎이로 개업한 부동산 사무실은 업 앤 다운이 심한 경기 탓에 늘 아슬아슬했다.
7년 전, 내가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노후 소일거리로는 이게 최고"라며 등을 떠밀어 따게 한 손해평가사 자격증이 이제는 든든한 보험이 되었다.
부동산 손님이 뜸해 무료하던 차에, 남편은 협회에서 배정해 준 봉화 두메산골로 농작물 재해평가를 떠났다. 산지의 비경과 맑은 공기에 반해 사진을 보내오던 남편은 전화기 너머로 들뜬 목소리를 전했다.
"여보, 여기 고추가 너무 좋네. 좀 사갈까?" 기특하게도 올겨울 김장용 고춧가루를 미리 챙길 생각을 한 것이다.
현지 농가에서 직접 공수한 마른 고추는 가격도 저렴하고 빛깔도 고왔다. 하지만 '저렴함' 뒤에는 혹독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우리 부부는 거실에 고추를 펼쳐놓고 꼭지를 따고 마른 수건으로 한 알 한 알 닦아내기 시작했다.
시중의 고춧가루를 무조건 믿기엔 세상이 흉흉하다. 지인으로부터 '국산 태양초'를 믿고 샀다가 비닐 조각이 섞여 나와 섬뜩했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이 수고로움을 피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요령 없이 맨바닥에 앉아 TV를 보며 시작한 작업은 두 시간 만에 '중노동'으로 변했다. 첫날 작업을 마치자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파스를 붙이고 남편의 마사지를 받으며 온갖 비명을 지른 끝에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깨끗한 고춧가루 먹으려다 허리 병신 될 뻔했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둘째 날은 전략을 바꿨다. 식탁 위에 고추를 쌓아두고 의자에 커블 체어까지 장착했다. 손목 보호대까지 차고 비장하게 임한 끝에야 비로소 20근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온몸이 쑤시고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햇살에 잘 마른 고추의 선명한 붉은빛을 보니 묘한 승리감이 차올랐다.
올해 우리 집 김장은 그 어느 해보다 달고 매콤하며 청결할 것이다.
다가올 겨울, 김치통을 건네며 딸들에게 큰소리칠 내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다.
"올해 김치는 아빠가 봉화 산골에서 직접 공수하고, 엄마 아빠가 허리 끊어지며 닦은 귀한 몸들이니 남기지 말고 싹싹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