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는 사라졌어도 기품은 남았다

by 해림

장롱 문을 열 때마다 숙제처럼 남아있던 오래된 옷들을 드디어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방바닥에 펼쳐놓은 옷들을 보니 하나하나 사연이 깃들어 있어 만감이 교차한다.


가장 먼저 나를 공격한 것은 옷을 구입하던 당시의 내 심리 상태였다. '뭐 하러 저런 옷을 샀을까?' 형편이 넉넉지 못하던 시절, 무리해서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던 과거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낭비했던 옷값이 아까워 마음이 쓰라렸다.


그동안 이 옷들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것은 내 소비를 정당화하려는 일종의 위안이었다. "퇴직하면 입겠지", "허리살 빼면 맞겠지"라는 구차한 변명들로 나중을 기약하며 외면해 온 세월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미련을 놓아줄 때가 왔다. 할부금의 무게를 견디며 큰맘 먹고 샀던 비싼 옷들까지 모두 대형 바구니에 담았다.


낑낑거리며 아파트 의류 수거함에 묵직한 보따리를 밀어 넣고 나니, 아파트 평수가 한 평은 늘어난 듯 속이 다 시원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유일하게 구출해 낸 옷이 하나 있다. 1992년 제조, 올해로 서른세 살이 된 '물방울무늬 원피스'다.


큰딸이 두 살 무렵,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나의 허영심이 앞서 거금을 들였던 어느 브랜드의 옷이다. 촘촘한 도트 무늬와 고급스러운 옷감,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은 패션에 무지했던 내 눈에도 완벽해 보였다.


구입 후 십 년 넘게 여름마다 교복처럼 입다가, 유행이 지나 서랍 깊숙이 처박아둔 지 20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다시 입어본 33년 된 원피스는 신기하리만치 멀쩡했다.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과 좋은 원단 덕분인지 지금 입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게다가 결혼 이후 몸무게 변화가 거의 없었던 덕분에 수선 없이도 몸에 꼭 맞았다. 방학 중이라 학교에 이목이 적은 틈을 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그 원피스를 입은 채 출근했다.


절친한 행정실장님은 "이 옷이 33년 전 옷이라니요! 지금 입어도 충분히 근사합니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피스를 입고 걷는 순간, 새 옷의 광택이 자르르 흐르던 그 시절의 기억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남들 따라 시작한 '어른 놀이'에 스물여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엄마가 되었고, 모든 것이 힘에 부쳐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엄마로서도, 며느리로서도 내 정신적 성숙도는 턱없이 부족했다. 교사로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역할극조차 쉽지 않았던 그 힘겨운 시간들이 떠올라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언뜻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오라기가 군데군데 빠져나왔고, 예전의 윤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옷의 주인인 나는 그 변화를 정확히 안다.


비단옷만이 아니다. 내 몸에서도 삼십 년 치의 젊음이 빠져나가, 남들 눈에는 그저 나이만큼 겨우 멀쩡해 보일 뿐이다.


하지만 사라진 윤기 대신 내게는 '단단함'이 남았다. 지나온 세월이 매서웠던 만큼, 이제는 웬만한 시련에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짱짱한 내공이 생겼다.


새 옷을 입었을 때의 정신적 방황이나 신체적 연약함은 더 이상 없다. 이제 옷 안의 나는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만큼 강력해졌다.


누군가는 내게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연륜이 물씬 풍긴다'는 칭찬을 듣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낡았음에도 부드러운 기품을 유지하는 저 원피스처럼, 나 역시 세월로 무장한 채 꼿꼿하게 서서 전진하고 있다.


내일도 다시 이 원피스를 입고 출근하려 한다. 서툴고 막막했던 스물여덟 살의 마음을 상기하며, 환갑 넘은 여유로운 배짱을 장착한 채 당당히 교문을 들어설 작정이다.


내 삶의 증거가 된 33년 된 원피스를 통해,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소중한 세월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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