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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an 25. 2024

은둔형 외톨이, 자발적 금쪽이…

초등학교 시절 내내 따돌림을 당했던 이유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좋았던 기억보다 나빴던 기억이 훨씬 지배적이었다. 불우했던 유년시절, 가난했던  집안 환경,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부재로 집 안에 덩그러니 자리했던 나의 유년기는 생각보다 꽤 많이 어두웠고 침울했다. 만 7세가 되기 이전 부모님의 이혼 발표는 내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다 줬다. 왜 드라마에서 보면 엄마와 아빠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그것을 바라보며 숨죽여 지켜보는 어린아이가 있질 않은가, 그게 꼭 나였다. 나는 부모님의 이혼 서류에 도장이 찍힌 후 엉엉 목놓아 울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지인에게 보증을 서주었는데 그 일이 화근이 되어 이혼에 까지 이르렀다. 막대한 빚을 지고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었던지 아버지는 두 분이 갈라서는 것에 마음을 굳히셨고, 그 일 이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십여 년간 어머니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어떤 소식도, 어떤 연락도 닿지 않아 한편으론 그저 어딘가에서 잘 살아 계시기만을 기도하기도 했다.


#1

초등학교 입학 후,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남루한 옷차림, 교실에 있는 듯 없는 듯 항상 책상 한자리를 조용히 고개 숙이고 앉아 있던 소녀, 그게 바로 나였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기도, 아는 체를 하기에도, 분위기상 쉬이 범접하기 어려운 어두운 표정이라서였는지, 어떤 누구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저 수업 시간이 진행되는 동안, 발표가 이어지는 동안, 묵묵히 내용을 받아 적고 책을 넘기고, 책상과 칠판만을 응시하는 것이 내가 하는 행동의 전부였다. 


#2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그렇게 3년이 지나도록 나는 항상 말이 없고 낯빛이 어두운 아이로 자랐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친구들의 학급 수는 더욱 많아졌던 것 같은데 여전히 내 주변에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아이가 없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말없이 책상을 응시하고 있던 내게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게 중에는 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친구도 있었다. 발표도, 대답도, 어떤 반응도 무미건조하게 넘긴 탓에 그랬던지, 한 친구는 내가 같은 반의 인원이라는 사실조차도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반 남자아이들의 놀림이 시작되었다. 내가 자리에 가서 앉으려고 하면 일부러 책상의 의자를 빼서 넘어뜨리거나, 학급의 책상을 다 밀어 놓고 청소를 하는 시간이 되면 내가 앉아 있는 것을 알면서도 책상을 쭈욱 한대열로 만들어 밀어 넣고 내가 일어서지도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게 심술을 부렸다. 


#3

한 몇몇은 불쌍하니 그만 멈추라며 행동을 제지하기도 했지만, 남자아이들의 횡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마도 본인들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내가 울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던지, 괴롭힘은 수업 시간에도 이어졌다. 쪽지로 폭언을 적어 내 표정의 반응을 살피거나, 조별 과제를 할 때에도 내가 참여하지 못하게 서로 과제를 하고, 선생님께는 내가 하기 싫다고 했다며 협동 과제를 참여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해서 혼이 나기도 했다. 


#4

어느 날은 조용히 창 밖을 보고 있는데 한 남자아이가 체취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니, 내가 입은 옷이 어제와 그제 동일한 옷이라며 냄새가 난다고 했다. 모두가 동조하듯 나의 냄새에 대해 한 마디씩 덧붙이더니 이내 코를 막고 나를 등지고 앉아 키득대며 비웃기 시작했다. 부끄러웠다. 세탁이 되지 않은 옷가지에서 결국 선택할 수 있었던 옷이 이 한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내 옷차림을 기억했고, 이내 웃음거리로 만들어 나를 조롱하는 모습에 나는 어떤 반발도 하지 못했다.


피해가 가는 행동을 주지 않았음에도, 말수가 없고 내성적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들의 원성을 사는 것인가 하며 울컥했던 감정이 올라오자 서러웠던 마음에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아이들은 책받침을 내 주변으로 하나둘씩 세우더니 내가 우는 모습을 선생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킥킥대며 내가 우는 모습을 숨기기에 바빴다.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반 아이들은 그렇게 내가 우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책받침을 이용했던 행동들이 재미있었다는 반응이었다. 그 후로도 5명 조별로 앉아 있는 형태의 자리 덕에 나는 학년이 올라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따돌림을 당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나 역시도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렇게 학교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있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힘들었을 뿐이었다.


#5

초등학교 4학년, 한 번은 학교 학생회장을 하고 있던 친언니의 도움으로 한 남자아이의 괴롭힘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 내 두어 번은 같은 반을 했던 이였는데, 유독 내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툭툭치고 지나가거나 나를 혐오하는 듯한 표정으로 주시하곤 했었다. 


그리고 어느 날은 하교를 하려 유리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 아이는 내가 학교 밖을 나서지 못하게 가방을 잡아 늘어뜨리고 팔을 뒤에서 잡아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데 그 아이는 힘을 이용해 팔을 붙잡았고 결국 나는 힘에 못 이겨 유리문을 놓쳤다. 얼굴을 부딪치며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입술은 문과 부딪치며 터졌는지 피가 흘렀다. 눈물이 핑 돌고, 억울한 마음에 처음으로 언니의 6학년 교실에 올라갔고, 그 길로 언니는 그 남자아이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 일 이후로, 그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주변에 오거나 말을 붙이지 않았다. 


#6

초등학교 5학년이 올라가며 그때까지도 나는 소풍을 갈 때 같이 돗자리에 앉아 김밥을 나눠 먹을 친한 단짝 친구 한 명이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지정해 주는 곳에 앉아 여럿이 모인 자리에 아침 일찍 사온 천 원짜리 김밥과 음료수 한 캔을 먹는 일 말고는 소풍도 그다지 재미있지가 않았다. 


그 마저도 보물찾기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학급 인원수를 파악하지 않은 담임 선생님 덕분에 나는 낙오가 되었고, 한참을 반 아이들을 찾아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근무 중인 아버지께 공중전화로 수신자부담 전화를 걸었다. 


집과 40분 거리인 소풍 장소에서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아버지는 내가 단독으로 행동해서 낙오가 되었지 않냐며 꾸지람을 하셨다. 모두가 즐거워할 소풍 날, 나는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소풍에 따라오지 말걸 하는 후회만 들었다. 어린 날의 기억이다. 추억으로 자리할 소풍에는 '낙오'라는 기억이 부끄럽고 창피한 기억으로 자리했다.


그 뒷날에도 선생님께서는 내가 왜 없어졌는지, 집으로 귀가했는지 달리 물어보질 않으셨다. 아마도, 난 그때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공기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지금 같이 아이를 키우는 상황에서 단체 활동 중 아이가 없어졌다 하면 반의 담임 선생님도, 부모님도 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이유를 한 번쯤은 물어봤을 듯싶은데 어른들은 아무도 내게 왜 그날 사라졌는지, 어떻게 해서 집에 돌아왔는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건 같은 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7

내가 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을까,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유독 친구들은 왜 나를 싫어했을까 를 떠올리면 나는 은둔형 외톨이, 자발적 금쪽이 같이 행동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친구들을 사귀는 방법을 모르고, 혼자서 있으려 만 하고, 웃는 일 보단 고개를 숙히는 일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반 아이들은 이런 나를 괴롭힘의 대상으로 삼았을 수 있다. 그저 나는 부모의 이혼을 겪었고, 우울했으며,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았고, 어떤 모임과 행사에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8

나는 어쩌면 불안이란 감정이 지속적인 일상을 겪으며 학교 생활에서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는 부적응자였을지도 모른다. 슬픔과 절망, 압도적인 불안은 내게 계속해서 두려움과 불안증을 안겨주었고, 이런 불안정한 모습은 또래 친구들로 하여금 상호 작용이 온전히 제대로 되지 않는 내게 반발심이 들었을 것이라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감으로 인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려했고 대인관계와 사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켰기에 자발적 왕따 내지 금쪽이에 속했을 것이다.


#9

근래에는 집단 따돌림, 왕따, 학교 폭력에 관해 수 없이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약한 자를 자신의 도구로 여기며 위협을 가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사건들도 많다. 이전 같이 대가족의 형태보단 소가족의 형태로 바뀌어 오면서 사회의 그물망이 이제는 현저히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제멋대로 성장한 아이들, 부모에게 방임된 아이들, 친구를 괴롭히며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것들에 혈안이 된 아이들, 친구의 괴롭힘에도 어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평생을 따돌림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아이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는 은둔형 외톨이, 자칭 은둔형 외톨이에게 한마디만 전해주고 싶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무력감에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았으면 한다고. 또, 그 고립이라는 게 나를 지켜주지 않고 오히려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를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결국 그 고립 안에서 나오고 나의 목소리를 내야 남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 그리고 지금 겪은 불행과 힘든 상황은 본인의 탓이 아니라고, 잘못하지 않았다고 위로해 주고 싶다.


사진출처 <Pinterest>



안녕하세요, 무무입니다. 이 글을 적고 발행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따돌림'에 대해 글을 적을 수 있을지, 내 속에 있는 글을 텍스트로 온전히 적어볼 수 있을지, 그리고 이 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하고, 혼자서 꽤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 그 유년기 시절 해소되지 못했던 미해결 감정을 글로 적어보다 보면 아팠던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 쉽지 않은 글쓰기였기도 합니다. 분명 지금은 서른을 훌쩍 넘은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때 그 아픈 감정을 돌이켜 보자면 상처받고 힘들어했던 유년기가 떠올라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다시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상처에 메어서 현재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내면의 아이가 불쑥하고 튀어나올 때, 아이들에게 나의 감정이 오롯이 전이될 것 같아 상처를 계속해서 적어내고 있습니다. 


제가 적고 있는 글들은 부모의 이혼에 대한 원망, 힘들게 보내왔던 유년기에 대한 우울, 이혼에 대한 실패와 상대 배우자에 대한 배신감과 홀로서기에 대한 글입니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저는 제 상황을 객관화시키며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리고 저의 상황과 같은 어려움을 겪은 분들께도 용기를 줄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도 날것 그대로의 글을 적으려 노력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글들로 가득 차게 될 이 공간이 있어 감사하고, 또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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