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무 Oct 15. 2023

아버지의 국제결혼… 이혼

따갈로그어로 욕한다고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1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좋았던 기억보다는 나빴던 기억이 훨씬 지배적이었다. 열두 살이 되던 무렵 아버지는 교회 목사님의 추천으로 국제결혼을 하기 위해 해외에 나갔고 그곳의 젊은 여성을 혼인을 위한 명목하에 금전을 지불한 뒤 결혼식을 치르고 한국에 돌아오셨다. 자그마치 나이 차이가 30살은 될법해 보이는 20 중후반의 젊은 여성이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낯설기도 했으며 자국을 떠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서인지 이 여성은 집에 온 첫날부터 눈물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식성도 맞질 않으니 밥도 도통 먹질 못해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어쩌자고 저런 여성을 집에 들인 것인지… 반문하고 싶었지만 이때의 아버지는 속수무책이라는 표현이 걸맞았다. 아니, 마냥 들떠보이기도 했었다.


#2

매일 훌쩍 거리며 자신의 친구와 통화를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이 여성은 매일같이 집에 보내달라며 아버지께 애원을 했고, 급기야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반대로 내 입장에서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고 팔려오듯 타국에 있게 된다면 그만큼 불행한 일이 없으터, 짠하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자행한 아버지와 교회 목사님이라는 작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말로만 듣던 국제결혼이 우리 집에서 일어나다니


#3

어느 날 집에 한바탕 소동이 났고 집 안에 있어야 할 그 여성은 짐 하나 챙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건너 건너 듣기로는 이 여성과 매일같이 통화하던 여성이 있었는데 그 여성 역시 목사가 알선해 국제결혼을 돕고 한국에 건너왔으며 그 여성과 애인 사이였고, 훗날 한국에서 살 수 있게 한국국적을 취득하게 되면 둘이서 따로 지낼 생각을 갖고 한국에 온 것이라는 소리였다. 국제결혼 시 배우자가 결혼비자를 받아 한국에 입국하면 혼인관계가 유지되면서 한국 내 실거주 기간이 2년이 경과하면 한국국적취득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행동에 옮긴 것이었고, 그 결과 국적 취득을 하지 못하더라도 도망을 선택한 것이라 추정된다.


#4

쉰이 넘은 나이의 아버지와 부유하지도 않은 살림살이, 초등학생 고학년 자매 둘이 있는 집에 엄마가 되길 자처하며 결혼을 할 스물 중후반의 여성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때 양반과 노비가 있던 계급사회에서는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여성이 결혼이라는 선택을 함과 동시에 자국에 있을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애인과 함께 도망간 것에 되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쾌하다는 표현이 아무래도 적합할 테지, 다들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결혼이라고 이어 붙이고 부추겼으니 말이다.


#5

국제결혼의 실패로 아버지는 며칠을 근심하시는 듯하더니 이내 또 출국 준비를 하셨다. 농담이겠지 했던 것이 정말 현실로 다가왔던 게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 이내 가득 채워지고 두둑해졌을 때쯤이었다. 지난번에는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해서 젊은 여성이 하루아침에 내 엄마가 될 것이라 통보를 하시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지난번 갔던 곳에 다시 다녀오시겠다고 했다. 그 뜻은 굳이 단어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또다시 국제결혼을 하러 가시는 것이었다.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언니가 아버지께 물었다. "아빠 가지 않으시면 안 돼요? 가지 마세요", "우리는 엄마 없어도 돼요. 괜찮으니까… 가지 마세요" 정말이었다. 우리는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나 그리웠지만 그 빈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존재는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완강했고, 그 길로 다시 비행기에 오르셨다. 그리고 사일 후 새로운 여성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 이번엔 스물여덟, 아홉 정도의 나이를 먹고 예쁘지 않은 외모에 퉁퉁한 체형, 어딘가 모르게 고집 있어 보이는 느낌의 여성이었다.


#6

이 전에 왔던 여성보다는 제법 한국어를 배우려는 의지가 있었던 그 여성은 하루가 다르게 한국에 적응을 해갔다. 생각보다 잘 적응을 하는 모습에 저 사람은 도망을 가지 않겠구나 싶은 생각에 이상한 안도감까지 들었다. 이 여성이 오고 난 후부터 언니는 집을 떠나 친구 집을 전전하며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국제결혼을 또다시 하고 들어온 아빠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 그리고 본인과 열다섯도 차이가 안나는 여성을 엄마로 데리고 온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리고 그 길로 언니는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친구와 함께 지내게 되었으며 그때의 나이가 이제 막 15살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7

처음 1년은 그래도 복작복작하니 아버지가 그 여성분과 잘 지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한국어가 늘어가면 갈수록 여성분의 요구 사항은 많아졌다. 자신의 부모님 집에 얼마를 부쳐달라, 나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나는 이게 없다 하며 금붙이를 자꾸만 사달라고 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시는 것도 아닌 아버지는 그때마다 돈이 없다며 일관하시다가 종일 들들 볶이는 통에 결국 이 여성분이 원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곤 했다. 매일매일 돈의 연속이었다. 눈만 뜨면 돈돈돈…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건지 당최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다투기가 힘들었던 아버지는 매일 쩔쩔매시며 그 돈을 충당하시기에 바빴다. 훗날 알게 된 바로는 자신의 부모님의 집을 샀다는 정도


#8

열다섯이 되던 무렵, 나는 무려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생겼다.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아이는 매일을 울어댔고 출산 후 우울감이 컸던지 그 여성분은 아이를 울리고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아졌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이의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아이가 운다며 화를 내며 분유를 타며 탁탁 물건을 쳐대며 화를 분출하는 여성분의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원치 않았던 임신이었고, 출산이었다. 내가 보기론 그랬다. 


#9

아이가 태어나고 기고, 앉고, 서고, 걸어 다니는 중 나는 이 아이를 동생으로 받아들이기에 역부족이었다. 아이를 안아보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아이에게 분유병을 들이밀며 우유를 먹여달라는 부탁도 매우 힘들었었다. 하루아침에 태어난 이 아이는 얼굴색이 짙고 눈꺼풀이 부리부리 한 게 육안으로 보기에도 한국 사람과 그쪽의 사람들을 반 반 섞은 혼혈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이는 계속해서 자라났고, 어느덧 내 방문을 두드리며 같이 놀아달라고 울고 보채는 나이가 되었다. 


#10

동생을 살뜰히 챙기지는 않았지만 씻기고 옷을 입히고 기저귀를 가는 일 정도는 제법 할 수 있게 된 나는 동생이 커가는 과정들이 신기했다. 또 한편으론 이 아이가 자라며 조금은 한국인의 형상을 조금 더 닮아 혼혈인의 테가 나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동생은 착했고 웃음도 많았으며 나를 곧잘 따랐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엄마가 있지만 같은 아빠가 있어서 가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11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대기업의 생산직에 취업을 하기로 한 나는 곧 있으면 타지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아버지와 여성분이 여느 때와 같이 돈 문제로 다투며 한참을 언성을 높였고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아버지에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때에 보다 못한 나는 여성분께 반기를 들었다. "욕하지 마세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게 얘기하시면 안 되잖아요" 타국의 언어로 돌아온 말은 putang ina(부땅이나) 였다. 따갈로그어로 씨x이란 욕이었다. 7년 정도 이 단어를 들었다. 항상 화가 나면 부땅이나, 부땅이나모, 사삼 발린 끼따(sasam balin kita)를 외치던 여성의 말에 검색을 안 해본 내가 아니었다. 동남아 말로, 따갈로어라고 한다. 옮겨적자면 그 말들은 씨x, 네 엄마 창녀야, 귀 싸대기를 때려버릴라 라는 뜻이었다. 분명 뜻을 알고 있었지만 대응하지 않고 그냥 잠자코 있었던 것은, 이렇게도 지지고 볶는 재혼 상황에서도 아빠는 희노애락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식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 삼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컸다.


#12

"욕하지 마세요, 그 말 뜻이 뭔지 알아요!", "부땅이나모, 부땅이나!!사삼 발린끼따!!",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네 부땅이나!!" 한국어로 씨발을 읊조리며 아버지의 무능력함을 탓하던 여성분께 처음 들었던 반기였다. 용기였을까,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타지로 내가 취업을 나가버리면 밀린 육아와 살림살이로 아버지께 이와 같이 횡포를 부릴게 뻔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여성분과 맞섰던 것 같다. 십여분 넘게 밀고 밀치는 상황이 이어지다 아버지는 나를 뜯어말리시고 얘기하셨다. "네가 참아라. 분란 일으키지 말고, 네가 어차피 취업 나가면 이 집을 떠날 거 아니야, 그냥 네가 가면 돼.", "네가 나가라." 자기보다 나이 차이가 30살은 나는 배우자에게 매일 같이 욕지거리를 들으며, 상대방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매일 같이 일하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니,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내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반대편에 서서 성난 여성분을 위로하며 다독이고 있었다. 흐트러진 옷을 추스려 입고 그 길로 나는 집을 나왔다. 그리고 이 집에 다시는 발 붙이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때 난 열아홉 취업을 앞둔 여고생이었다.


#13

취업을 나가고 안정적으로 회사에 잘 적응할 즈음 큰 교통사고가 있었고 그 길로 퇴사를 했고, 전혀 다른 직종에 이직을 하게 됐으며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내며 지냈다. 내가 취업을 나온 직 후로부터 2년이 체 못되어 아버지는 다시 이혼을 하게 되셨고, 그 여성분은 아이를 자신이 살던 나라에 친정어머니께 보내겠다 하여 아이를 아버지가 도맡아 키우게 되셨다. 이혼 후 아이를 또다시 맡아 키우게 된 것은 아버지의 책임감이었을까, 아니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그곳에 팽개쳐 버림 하듯 자라나는 게 안타까워서였을까. 뭐가 됐건 나는 아버지의 책임감은 대단하다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책임질 수 없는 책임을 계속 만드셨다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한 번은 실수일지 몰라도 두 번은 그때부턴 실수가 아니다. 그냥 '실패'한 것이다. 제대로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맡아 키운다는 건 방임을 토대로 저 아이도 그렇게 자랄 것임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14

이후 직장생활을 하며 오랜만에 방문했던 고향에서 동창회가 있었고 그 틈에서 나는 책임감 하나는 아주 좋아 보이는 똘똘하고 다부진 남자를 보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 초반이었는데 군대를 막 전역했던 그 친구는 이것저것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또래 친구들과는 확연히 느껴지는 뉘앙스가 달랐다. 항상 약자의 모습을 연상케 했던 아버지의 그것과는 달리 똑 부러지는 느낌에 끌렸고 그 길로 친구와 연인 사이가 되며 3년 연애 후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게 갑갑한 현실에서 찰나의 도피인지,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 될지를 아마 그때 알았더라면 시작하지 않았을까? 아니, 나는 그래도 시작했을 것이다. 내게는 사랑스러운 토끼 같은 자식이 둘이나 생겨버렸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의 유년기, 그냥, 그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