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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l 04. 2024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나간다니요…

돈의 속성,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야 하는 이유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창문으로 나간다. (When poverty comes in at the door, love flies out of the window) 서양의 한 속담이자, 여느 드라마에 나온 대사의 한 구절인 가난에 관한 이야기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삶과 경제적으로 빈곤한 삶, 또는 그 어느 중간 즈음에 위치한 이들은 '돈과 가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할까. 필자는 가난의 굴레였던 주 양육자였던 아버지, 기초 생활보호대상자의 자녀로 십여 년 이상을 자라온 사람이다. 소득이 적을 때에 겪게 되는 이 '가난'은 당장에 불편함이 생활을 지배하게 될 때에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불편을 넘어선 생활의 고충은 가족의 구성원들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가난은 결핍도 함께 했다. 눈 떠서 눈 감을 때까지 이 돈에 대한 걱정거리가 없는 가정은 없을 테지만, 가난이 집안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족의 정, 가족들 간의 화합이나 평안은 쉬이 오지 않았다. 

가난해서,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여러모로 애를 쓰고 동동 거려 보아도 가난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 어떤 형태의 가난은 소원하던 희망을 접어야 했거나 일평생 다른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몸을 사려야 하는 것들이 대게였다.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의 가난이 아닌 자라면서부터 고착화된 가난한 환경에서의 빈곤은 금전적으로든 정신적, 육체적으로든 힘듦이 따랐다. 양육자의 가난은 가족 구성원에게 어려서부터 금전에 대한 고민은 물론 마음까지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리 몸을 바삐 움직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증으로 서주었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던 터였다. 우리 집은 늘 그렇듯 빚의 독촉 전화와 빚쟁이들의 방문에 노출된 가난한 한부모 가정, 기초 생활보호대상자였다.



#1


어렸을 적을 회상해 보자면, 누구나 기대하고 손꼽았을 누군가의 소풍날은 또 어떤 이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날들 중의 하나였다. 소풍 전 날 예쁜 옷을 사거나 소풍 도시락을 싸기 위해 시장을 보는 일, 다가올 소풍을 고대하며 잠자리에 드는 일은 내게는 거리가 멀었다. 이른 새벽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 동네의 불 켜진 김밥집을 찾아 배회하다가 운 좋게 김밥집 아줌마의 출근과 맞닥뜨려지면 꼬깃한 지폐를 건네고 김밥 한 줄을 사서 돌아오는 것이 소풍날의 시작이었다. 거창한 소풍 도시락은 고사하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김밥집의 천 원짜리 포일에 싼 야채 김밥 한 줄이 전부였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늘 혼자 도시락을 먹었던 내게 이 김밥 한 줄은 당장 먹어 치워야 하는, 남들이 볼까 두려워 얼른 입에 주워 담아야 하는 김밥이었다. 엄마가 싸 주는 예쁜 도시락,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도시락통에 정성껏 담긴 과일과 김밥, 음료수와 간식… 또래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엄마가 싸 준 김밥과 간식을 친구들과 나눠 먹고 소풍을 즐겼다. 부러웠다. 엄마가 꼭두새벽부터 따뜻한 밥에 참기름을 부어 갖은 재료를 듬뿍 넣어 만든 고소한 집 김밥이… 부러웠다. 아무 때고 도시락 통을 열며 또래 친구들과 반찬투정을 하며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그 모습이… 내게는 같은 날, 같은 동시간대에 있던 일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소풍의 여느 한 장면이었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전혀 익숙하지 않은, 같은 공간에는 있지만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사실 김밥 하나만으로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열을 올리냐 할 수 있는데 이런 순간순간들이 모여 가난이 이뤄지고 가난한 이의 마음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이해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자 추억으로 남을 이 날이, 누군가에게는 김밥을 서둘러 먹다 목이 메어 먹먹해지는 그때의 날에 고개를 짤짤 거리며 잊고 싶은 날의 기억일지도 모른다고…


#2


'가난'이라고 하면 대부분 어떤 형태의 가난을 떠올리게 될까?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 꼬질한 행색에 손발톱이 체 다듬지 않아 엉망인 몰골, 집안 어느 한 곳도 성치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누렇게 변색되고 벽 천장에는 퀴퀴한 곰팡이가 자리해 그곳을 땜빵하듯 달력이나 흰 종이를 덕지덕지 붙여 가리려는 시도의 흔적, 세탁되지 않은 옷가지들과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을지 모를 만큼 어지러운 집안의 모습과 변변치 않은 살림살이, 음식물 쓰레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가득 찼음에도 더 채울 것이 있는 모양인지 접시 건조대 한 귀퉁이에 자리해 초파리와 똥파리가 웅웅 대는 주방, 형태 모를 검은색 봉지들이 가득 찬 냉동실과 냉장실에 빽빽하게 채워진 음식물과 김치통, 빨간색 원통 찬합 서너 개, 벌써 몇 번째 재탕인지 모를 찌개 냄비와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그 외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어 냄새를 맡고 맛을 봐야 식별이 가능한 음식들, 정부에서 지원해 준 레토르식 짜장과 카레 등등…


내가 겪어 온 가난의 환경은 이렇듯 제 때 챙겨 먹을 수 없는 끼니와 건강에도 악영향을 줄 기한이 지난 음식물들, 불결한 위생과 난잡한 살림살이, 남루하고 허름한 외모와 낡고 어수선한 집이었다.

가난은 어떠한 형태로든 삶과 삶 사이에 결핍과 우울을 자아내는 벗어나고 싶은 일부였다.


#3


돈으로 시작된 부모의 불화와 이혼이 빚어온 불행. 그리고 그 사이에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였던 그 여느 어렸던 여섯 살 소녀는 자라나 아이러니하게도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엄마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졌던, 그래서 네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남매들을 두고 집을 떠나올 수 없었던 나는 그렇게 두 아이들을 데리고 타지생활을 시작했다. 유복했던 생활을 뒤로한 채 엄마손을 붙잡고 나를 믿고 따라온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겠노라며 의지를 다졌지만 현실은 말 그대로 녹록지 않았다. 


이혼 소송이 장기간으로 길어짐에 따라 무일푼으로 긴 시간을 양육권과 이혼소를 다투며 법적 공방을 시작했던 날들이 무색하게 합의로 빚어진 조정 이혼으로 끝을 내리게 되자 변호사 비용과 함께 승소비용의 대부분으로 위자료는 빠져나갔다. 대체로 이혼 소송은 변호사가 제일 좋은 위치, 배불려 주는 꼴이라며 이혼 한 당사자의 승과 패는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이혼 소송의 끝은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싸움이라는 말에 인정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누군가는 재산분할도 못 받고 끝이 난 나의 사정에 혀를 내두르며 끝까지 가서 이겼어야지 하며 비판하는 이도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젊은 여자가 애 둘 딸린 상태에서 이제 어쩌려고 그러냐며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느 일부는 그런 용기가 대단하다며 열심히 살라는 응원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하지만 냉정히 이야기해 보자면 이혼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며, 이후의 책임 역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었다.



#4


가난은 마음적 빈곤과 함께 가난하지 않은 이들을 대상으로 자격지심을 갖게 하는 열듬감의 일부분이었다. 가난을 정통으로 받아들이기에 나는 여렸다. 단지 내 상황이 부끄럽고 피하고 싶었고, 이는 나의 삶과 추구하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일조했다. 


첫 번째는 병원에 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가 통제하는 일이었다. 건강이 상하거나 금액적으로 크게 목돈이 들어가게 되는 치과 치료등은 우리 집의 사정 상 치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가난하기 때문에 병원에 갈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았다. 조심성이 많아진 이유도 포함이다.


두 번째 갖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기 위해 아이쇼핑이든 외부 외출을 최대한으로 줄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장 하지 않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아이쇼핑인데 물건을 보면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애초에 보지 않는 것이었다. 소유하고 싶은 물건이 생겼을 때 내 형편과 대입하면 이 돈이면 어떤 걸 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이 같이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또 생활비에 일부가 될 당장의 현금 상황에 대해서 계산을 하게 되기 때문에 애초에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소비하는 마음을 제한하는 쪽을 택했다. 


세 번째 가지고 있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다.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모으는 호더의 기질이 내게도 있는지 우리 집에 들어온 물건은 나갈 새가 없었다. 이 물건의 값어치를 생각하면 돈과 비례하게 되고, 그렇다면 쓰임이 없더라도 물건을 비운다는 것이 내게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물건의 감가상가는 고사하고 그저 들어왔을 때, 들인 비용에 대해서 아까워하는 마음이 내게도 은연중 생겼다는 소리다. 어렸을 적 물건을 모으고 고물상 마냥 베란다 한편을 그득히 채운 짐들 때문에 불편했던 때를 분명 잊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5


이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난의 굴레 앞에서 마음까지 가난해졌던 날들이다. 채무상환이 한평생의 고충이자, 빚쟁이로부터의 독촉이 환청이 되고 이명이 되고 생채기가 되어 매일 밤 정신과 약을 부어야지만 수면을 이룰 수 있었던 아버지의 그늘이다. 나에게도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의 꿈이자 현실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하나 둘 조금씩 모으고 모아 부를 이루게 된다면 나는 언젠가 경제적 자유를 꿈꿀 수 있는 이가 되지 않을까 하며 행복을 그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성실히 꾸준하게, 그리고 실천이 계속 되게 부를 축적하며 내 아이들이 가난의 대물림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지 않길, 그리고 배움의 길 앞에서, 이들의 꿈 앞에서 가난이라는 족쇄가 발목을 잡지 않길,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도 다양한 루트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일 수 있길 고대하며 매일을 노력한다. 이 긴 터널을 지나오면 분명 나의 상황도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하루가 모여 내일은 좀 더 나은 내일이 될 것이라고 믿어본다.


사진출처 <Pinterest>



어릴 적 제 꿈은 현모양처이자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절대 평범하지 않고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어렸을 땐 미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가족들이 모여 앉아 하루의 일과를 나누고 따뜻한 밥을 먹으며 수더분한 수다와 함께 웃게 되는 그런 소소한 일상, 제게는 그런 일상이 부족했습니다. 아니, 그런 일상이었다면 저는 지금의 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유년기 때를 비교해 보면 그래도 꽤나 많이 노력에 의해 밝아진 케이스이기도 하고, 그런 노력으로 인해 지금이 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스탠스와 자존감, 그리고 사랑을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아니, 그런 마음이 들라치면 쪼들리고 어렵게만 사는 자신의 모습과 맞물려 되려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잘 사는 이들에 대한 열등감이 더욱 커지기도 합니다. 돈이 전부는 아닐지언정 한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게 된 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큰 틀로 놓고 보았을 때 이 가난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더 큰 도약을 위해 발판으로 삼을지, 아니면 평생을 돈돈 거리며 아등바등 살지는 본인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라는 것이죠..

안녕하세요. 무무입니다.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서 브런치스토리에 돌아왔습니다. 번아웃이 오고 나서부터는 어떠한 일에도 의욕이 없고 무기력의 늪에만 빠지게 되는 것 같아서 이 감정을 덜어내려 애를 썼지만 쉽게 덜어지지 않았음을 시인합니다. 일전에 감정 노동과 정신적 스트레스는 존재에 가치에 대한 회의감은 물론이거니와 제가 잘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까지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하루에 잠을 두어 시간 정도 자고 몽롱한 상태에서 매일을 그렇게 흘려보내길 반복하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한 순간 몰아세울 수는 없는 것이구나를 인정하고 스트레스 관리를 하기 위해 일정 부분 계속 쉬어줄 수 있도록 하니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저 내 상황에서 더 나은 상황을 그리고자 앞으로만 달리다 보니 내 몸이 어떤지는 챙기지 못했던 제 자신에게 한편으론 미안해지더라고요. 그저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우면 잘 수 있게 하고, 힘들면 잠시 잠깐이라도 쉴 수 있게 그런 쉼을 주니 이제 조금은 살 것 같습니다. 염려해 주시고 언제고 돌아올까 닫힌 브런치 대문을 두드려 주셨던 작가님들의 귀한 발자취를 보며 이제 조금씩 나아져야지 하며 다짐해 봅니다. 지치지 않게 잘 이겨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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