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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 Mar 04. 2024

인생 첫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했다

언젠가 찾아 올 임신과 출산 그 순간에 대해

그날은 유독 몸이 서늘했다.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찌나 온몸이 차갑던지 결국 홑이불을 하나 더 꺼내야 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피로했다. 오전에 커피를 두 잔이나 들이부었는데도 눈이 꿈뻑꿈뻑 감길 정도였다. 


내가 감기에 걸렸구나. 다행히 지난달 먹다 남긴 감기약이 있었다. 한 손에 쥐어 입에 털어 넣으려다 불현듯 손을 멈췄다. 마지막 생리일이 언제였더라. 일주일 가량 지나있었다. 깊은 바다에 홀로 빠진 듯 커다란 불안이 엄습했다. 설마. 감기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극초기 임신 증상'. 인터넷에 올라 와 있는 블로그 게시글들을 열 번도 넘게 읽은 것 같다. 피로, 불안, 추위, 부정출혈 등등. 몇 개는 내 상태와 맞아떨어졌다. 속이 울렁거려 좁은 방 안을 뺑뺑 맴돌았다. 저녁이었지만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들지 않았다. 불안 때문인 지 수족냉증으로 차가운 손과 발이 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피임을 했는데도 임신이 될 수 있나. 근처 약국으로 임신테스트기를 사러가며 머릿속에서 수십 번이나 되물었다. 피임기기를 사용해도 100% 피임이 되는 건 아니다. 이전에 한 유튜브 영상에서 산부인과 의사라던 남성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피임을 해야 그나마 안전한 상태가 된다고. 재작년에 부작용으로 복용을 멈췄던 피임약이 생각났다. 바보같이, 아파도 그냥 먹을걸. 후회는 해봐야 늦었다.


임신테스트기를 사용 후 결과가 나올 때까지 화장실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나는 침대 위에 송장처럼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몸이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지길 반복했다.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았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만일 임신이라면. 먼저 남자친구한테 얘기해야겠지. 그와 고작 반년 만났을 뿐인데. 아직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데 가정을 꾸려도 괜찮을까. 아빠가 된 그와 엄마가 된 내가 상상됐다. 이미 결혼적령기에 들어 선 우리 모습이 퍽 어색해 보이진 않아 쓴웃음이 났다.


부모님과 친구들한테도. 물론… 직장에도 알려야겠지. 다들 축복의 눈빛일까, 아님 염려의 시선일까. 아이를 언젠가 낳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게 계획된 상황에서만 상상해 왔던 일이었다. 내 나이가 서른이 넘는다던 지, 결혼 후 몇 년이 흐른 후에라던 지. 아이는. 아이는 잘 키울 수 있을까. 남자친구도 나도 아직 사회초년생인데. 앞으로 돈은 어떻게 마련하려고. 집은. 서울 값이 얼마나 비싼데. 임신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부모님도 이제 연로하셔서 기대고 싶지 않은데.


그동안 밤낮으로 쌓아왔던 커리어도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아이를 갖게 되면 분명 그만둬야겠지. 그간 얼마나 오랫동안 노력했는데. 어떻게 달려온 길인데. 한낮의 꿈처럼 삶이 일시에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온갖 생각들이 토네이도 돌듯 온몸에 휘감겼다. 마치 이제 시작이야, 시작이야 하고 속삭이는 것처럼. 5분이 지났다. 나는 물에 젖은 종이처럼 추적추적 화장실로 향했다.


한 줄. 임신테스트기를 보자마자 짧은 탄식이 나왔다. 텀블링을 신나게 타다가 지상에 내려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행이다. 그간 임신이라 확신하며 안절부절못했던 시간들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날 저녁, 정말 거짓말처럼 생리주기는 다시 돌아왔다. 나는 달력에 새로운 주기를 체크하며 무언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 안의 작은 아이가 '엄마, 다음에 올게'하고 손인사를 하는 것 같은, 그런 몽글몽글한 느낌이었다.


피임을 했든 안 했든, 어떤 관계가 있는 한 여성은 늘 임신의 가능성이 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늘 마음을 유연하게 가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당장 상황을 맞닥뜨리니 마음은 정처 없는 깃발처럼 제멋대로 나부꼈다. 


애초에 유연하게 마음을 가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임신은 여성의 삶에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변화들을 만들어간다. 어떤 한 사람과 영원히 연결되는 유대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루틴, 사람관계, 직업, 취미 등 삶의 많은 것들을 뒤흔든다. 그간 임신을 한 친구들에게 느껴 온 경외감이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오랜 세월 그려온 삶의 곡선을 새로운 색깔로 다시 칠하는 거니까. 너무나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니까.


임신을 생각하고 있는 여성이라면 언젠가 맞이할 그날. 오늘은 웃으며 넘길 정도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먼 훗날 예상치 못한 날에 아이는 깜짝 선물처럼 나를 찾아올 수도 있다. 어쩌면 먼 미래의 얘기로만 여겼던 임신과 출산을 이번 일로 인해 처음으로 깊게 고민해 보았달까. 그리고 여성으로서 나의 삶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과 애틋한 미련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언젠가 만나게 될 아이야, 나의 아이야. 엄마는 조금만 더 지금의 삶을 살다가 만나러 갈게. 그때까지 조금만 하늘에서 미래의 엄마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구경해 줘. 먼 훗날 꼭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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