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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 May 17. 2020

아빠, 이윤희씨를 잘 부탁할게.

아빠만 몰랐던 이야기들, 이렇게 편지로 남겨

안녕, 아빠.  

나 아빠 딸 여울이야. 놀랐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런 사람들이 다 보는 공간에 긴 글을 남겨.

다른 건 아니구, 지금도 빨래 다 끝내고 아빠 옆에서 곤히 자고있는 계신 엄마에 대한 거야.

분명 아빠는 모르겠지만, 꼭 알아야만 하는 엄마의 마음병을 말해주고 싶어서.


엄마가 지독한 마음병에 걸린지는 좀 오래됬어.

전에는 자주 훌쩍이곤 하셨는데, 요샌 갱년기까지 겹쳐서 더 힘들어 해.

또 귀찮다고 휙휙 넘기지말고 꼼꼼히 읽어. 아빠는 엄마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잖아.







"좌회전, 좌회전! 아이구, 이 여편네. 운전 똑바로 안 할래?" 




 요새 부쩍 아빠가 엄마한테 짜증내는 일이 많은 거 알아? 음식 맛으로 투덜투덜, 가계부로 투덜투덜, 운전솜씨로 투덜투덜. 심지어 짜증낼 때마다 엄마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여서 참을 수가 없었어. 대부분  사소한 실수들이었잖아 . 엄마는 아빠의 볼멘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 그런거야? 아유, 또 내가 깜박했지.' 라며 늘 유하게 넘어가셨지. 내가 '아빠 요새 너무 심한거 아냐?' 하며 화낼 때 마다, 엄마는 '내가 너무 착해서 그래 - ' 하며 또 다시 어물쩡 넘겨. 근데 아빠, 엄마는 아빠가 짜증낼 때마다 속상함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래. 엄마는 사소한 일에도 남편 최고, 남편 짱, 남편밖에 없어, 하며 아빠 칭찬을 과할 정도로 해주잖아. 아빠, 엄마는 아빠의 성질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야. 아빠, 엄마도 사람이잖아.



"아줌마, 밥 줘!" 



아빠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엄마를 부르는 호칭도 달라진 거 알아? 예전에는 '이여사' 나중에는 '여울엄마' 지금은 '여편네' 혹은 '아줌마'. 엄마보다 3살 많은 아빠가 그래도 연애할 쩍에는 '윤희씨-' 하며 달달하게 이름을 불러줬다는데. 여성들은 엄마가 되면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다던데 이런 건가 싶었어. 누구의 아내이자 엄마이기 전에 한 여성으로서의 이름, '이윤희'.  나는 언젠가부터 엄마한테 편지를 쓸 일이 생기면 일부러 제일 첫 줄에 "사랑하는 이윤희씨에게" 라 크게 적어. 이렇게 해서라도 엄마가 스스로의 이름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빠한테도 단 한 번이라도 엄마에게 진짜 이름을 불러주라고 했잖아. 그런데 아빠는 매번 낯 간지럽다고 피했지. 아빠, 엄마 이름은 '여울엄마'도 '아줌마'도 아니야. '이윤희'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이윤희'



"필리핀에서 새 아내 데려와야 겠다. 젊고 이쁜 아가씨로. 어때, 여울아?"



어떠냐고? 아빠가 그런 장난 칠 때마다 엄마 기분은 어떨 지 생각해봤어? 매번 엄마한테 살 쪘다고, 주름이 는다고, 아줌마 다 됐다고 놀려대는 아빠가 참 원망스러워. 엄마가 매번 웃어넘겨서 그렇지, 마음 속으로는 얼마나 속상해하고 아파하는 지 알아?


엄마의 일상은 교회가는 일 외엔 집안일 밖에 없어.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시던 교회도 못가서 한 동안 우울해 계셨고. 아침에 일어나서 종일 빨래하고 옷널고 반찬 만들고 설거지하고 티비 잠깐 보시다가, 다시 옷개고 밥하고 할머니 식사 챙겨드리고 이부자리 펴드리고 하루를 마무리 해. 아빠도 알겠지만 엄마 허리가 안 좋잖아. 가벼운 운동하기도 벅차시니까 쉬는 시간에는 주로 침대에 누워계셔. 가벼운 조깅 할 때 빼고는 하루 종일 집 안에 계시는거야. 그리고 엄마는 그런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주로 먹을 걸로 푸셔. 엄마 친구들이랑 밖에서 맛난 거 드시고 오는 날엔 그렇게 즐거워 하시더라구.


이런 저런 이유로, 비록 젊었을 적 만큼 늘씬하진 않으시지만 엄마는 변치 않아. 늘 해맑고 웃음 많은 우리 엄마, 세월이 흘러서 주름이 늘고 살이 늘고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는 이윤희씨야. 그런데 아빠가 엄마 외모 지적 할 때마다 엄마가 평소보다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느는 거 알아? 나는 엄마가 세월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엄마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했으면 좋겠어. 아빠, 나는 젊고 이쁜 엄마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우리 엄마가 좋아. 아빠, 나는 엄마가 외모로 더 이상 우울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좋아하는 취미라도 하나 해 봐. 맨날 그렇게 집에 퍼질러서." 



아빠도 알겠지만 엄마 꿈이 화가 일 정도로 그림그리기 좋아하잖아. 오빠랑 나 어렸을 때도 그림그리기를 얼마나 좋아하셨던지, 방 안에 늘 미술용품과 엄마가 그렸던 그림들이 한 가득 쌓여 있었는데. 아빠는 늘 엄마가 그림에 흥미를 잃어서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알아. 엄마의 성경책 귀퉁이에, 명세서 빈 자리에, 심지어 집에 날라오는 전단지 위에도 늘 엄마의 그림들이 있어 왔다는 걸. 엄마는 흥미를 잃은 게 아니야. 미술 용품 하나 살 걸 우리 신발 한 켤레 더 사고, 그림 한 장 그릴 시간에 우리 식사를 챙겨주느라 점점 멀어져 왔던 것 뿐이야.


저번 여름에 동네주민센터에서 7만원 짜리 미술특강 신청버튼을 몇 번이나 망설이는 엄마를 봤어. 우리 점퍼나 아빠 셔츠 살 때는 그렇게 한 푼도 안 아끼시던 분이, 여름특강 미술수업 고작 7만원이 아까워서 신청 못하셨어. 아빠, 엄마도 갖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정말 많아. 근데 늘 말씀 안 하시고 꾹 참으셔. 아빠한테 미안해서래. 엄마는 됐어, 엄마는 괜찮아, 엄마는 충분해. 늘 우리 남매랑 아빠 것 사느라 늘 자신을 뒤로 미루시지. 아빠는 알고 있었어?



"선물은 무슨 선물. 너희 엄마는 꽃 한 다발이면 행복해 해." 



작년 엄마 생일에, 엄마 엄청 기대 많이 한 거 알아? 매년 아빠가 안 챙겨 주긴 했지만, 올해는 뭔가 특별할 것 같다고. 진짜 아이처럼 설레하셨어. 아빠가 매년 엄마 생일을 어디서 얻은 쿠폰같은 걸로 어물쩡 넘겨왔단 걸 알아.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아빠가 그 날만큼은 로맨틱 가이가 되주길 바랬었어.


근데 아무것도 없었지. 아빠가 스마트폰 받침대로 사용했던 목걸이 상자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출근한 걸, 엄마가 생일 선물이라 착각하고 기뻐하셨던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엄마가 그 날 오후에 엄마 친구들 만나서 눈물까지 글썽이시면서 무척 속상해하셨대. 그런데 그 와중에도 엄마가 '그래도 우리 남편은 - ' 하면서 칭찬까지 했단다, 어이가 없어서.


엄마는 아빠 생일 다가오면 넥타이, 벨트, 초콜릿 등 사랑이 듬뿍 담긴 큰 선물상자를 준비해 직장으로 보내셨지. 회사 직원들이 얼마나 아빠를 부러워할 지 상상해보라고 하시면서. 아빠, 엄마도 맞찬가지야. 남편이 이것저것 해줬다고 엄마 친구들이 자기남편 자랑할 때, 엄마도 슬쩍 한 자랑하시고 싶으시겠지. 그런데 매번 그 자리에서 그냥 말없이 웃음만 지으실 엄마 생각이 나서 가슴이 너무 아파. 아빠, 엄마도 아내이기 전에 한 여자야. 제발 사랑한다고 주구장창 말만 하지 말고, 그 사랑을 표현해줬으면 좋겠어.


         




아참,


아빠가 퇴직하면 바닷가가서 어부된다고 그랬지?

추가로 엄마 바다 안 좋아해. 고즈넉한 농촌에서 한옥같은 집에서 사는 게 소원이라고 했어.

매일 회 뜨는 법만 검색하지 말고, 남편이니까 그 정도는 알고만 있으라구.


아빠, 걱정 마.


글은 이렇게 썼지만, 아빠는 이미 나에겐 최고의 아빠야. 다음 생에도 변함없이 나는 아빠 딸로 태어날거거든.

그러나 아빠, 나는 아빠같은 사람과 결혼하진 않을 것 같애. 남편감으로는 빵점이거든.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엄마한테 정말 잘 해줬으면 좋겠어.

소개팅 날 카페에 등장한 아리따운 엄마한테 첫 눈에 반했다고 했지?  

몇 년 동안 엄마 뒤를 쫒아다니며 사귀어달라고 졸랐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도 재밌어.

그 때의 그 간절했던 마음 만큼이나

엄마한테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전해주고 사랑을 말해줬으면 좋겠어, 후회하지 않을 만큼.


나랑 꼭꼭 약속해 줄거지?

사랑하는 나의 아빠. 우리 엄마 이윤희씨를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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