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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 Nov 15. 2021

할머니의 주기도문

할머니, 당신에 대한 기억


오, 주님. 제 말이 들리시옵니까….


오늘도 할머니 방에서는 주기도문을 읊는 소리가 가만가만 들려왔다.  밤공기 사이로 울려 퍼지는 작은 기도 소리가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한 마디, 한 마디… 느릿느릿하고 차분하게. 사랑하는 아들들과 며느리, 그리고 이젠 훌쩍 커버린 손자와 손녀를 위해. 할머니는 손을 모으고 또 손을 모으셨다. 혹여나 하느님이 고개를 돌리실까, 주름 가득한 눈을 행여 뜰라 꾸욱 감고서. 그날도, 할머니 방의 작은 전등이 할머니의 기도하는 손을 어른어른 밝혀주었다.


1. 당신의 청춘



동글동글한 얼굴, 흉터 하나 없는 말간 피부, 반달눈에 늘 웃음이 걸려 있는 입. 할머니에게 당신의 젊은 시절을 물으면, 할머니는 금세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동네 대표 숙녀가 따로 없었제.”  잠시 고모의 말을 빌리자면, 할머니는 10대 시절 대도시에서 여학교를 다닐 정도로 똑똑한 처자였다고 한다. 특히 수학과 무용에 매우 능해서 당시 일본인 교장선생이 자신의 집에 초대할 정도로 예쁨을 받았다고 한다. 그 교장선생은 할머니를 자신의 수양딸로 들이려 조부모님을 설득했지만, 당연히 딸을 내어주기 싫었던 그분들은 단호하게 사양했다고 한다. 그리곤 할머니를 멀고 먼 전남 깡촌에 보내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혼인을 시켜버렸다. 그때 할머니는 고작, 15살이었다.


꿈 많고 당찼던 소녀에게 뭣도 없는 깡촌 생활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하루 종일 밭일과 집안일에 시달렸던 그녀는 밤만 되면 몰래 도시에서 챙겨 온 책을 꺼내 읽으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어찌나 울었던 지,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가 언제쯤 야반도주를 할지’ 우스갯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외로움 속 버팀목이 되어줘야 했던 할아버지조차 입에 험한 말을 달고 사셨다고 하니 얼마나 힘겨우셨을까.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할머니를 딸처럼 여기며 매일 밤 따뜻이 안고 주무셨다고 한다. “자장… 자장… 서례야, 이 밤도 곧 지나가리 울지 마라…” 할머니는 그렇게 시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고단한 시골 생활을 버텨내셨다. 그리고 스무 살이 꺾이던 해, 자랑스러운 네 남매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 얘기를 전해 듣던 날,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만일 시간을 되돌려서 할머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갈 거야?” 할머니는 한 치도 망설임 없이 말씀하셨더랬다. “내 새끼들이 다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가누.”


2017년 4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노란 개나리꽃 피던 봄날이었다. 평소 험한 말로 상처 주면서 사셨지만, 그래도 그분을 가슴으로 사랑하셨던 할머니는 세상이 떠나가라 펑펑 우셨다. 15살, 멋모르는 나이에 맨 몸으로 시집을 와 생판 남이던 할아버지 곁에서 75년을 함께 하셨던 할머니는 그렇게 혼자가 되셨다.


2. 당신의 가족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결국 정든 낙안 시골집을 떠나 자식 집으로 상경해 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미 첫째 아들과 둘째 딸에겐 여러 문제로 등 돌렸던 할머니는 결국 막내아들이던 아빠에게 밤늦은 시각 전화를 거셨다. “나, 느그랑 같이 살면 안되긋냐….” 할머니의 떨리는 목소리에 아빠는 숨 죽여 울었다고 했다. “오세요, 어머님. 오세요… 저희 집으로.” 그렇게 할머니는 대전에 있는 우리 집으로 분홍 보따리 하나 인 채 함께 살게 됐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흘러, 벌써 5년째 우리 가족과 연말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의 시골집을 그리워하셨다. 금빛 볏논이 물결치던 고향을 떠나 온 당신에게 아파트로 빽빽이 들어 찬 도시는 그저 두려움이었다. 더구나 쑥쓰럼이 많은 할머니는 동네 노인정조차 걸음 하지 못하셨다. 그렇게 집에만 틀어박힌 채 성경책만 들여다보신 지 1년째 되는 날, 엄마는 할머니를 데리고 집에서 조금 떨어진 노인복지센터에 갔다. 낯선 공간에 대한 공포를 느낀 할머니는 ‘나는 그런데 절대 안 간다!’며 못 박았지만, 언젠가부터 당신 스스로 새벽 일찍 일어나 채비를 마치고 통근차가 오길 목 빼고 기다렸다. 그리곤 매번 센터에서 만든 미술작품들을 한 아름 들고 와선 “야야, 이 봐라. 이 할매가 만든 거다”하며 자랑하셨다. 그때마다 아이처럼 말간 웃음이 주름진 얼굴에 가득 핀 모습이 마치 소녀 같았다. 올해 초부턴 할머니를 짝사랑하는 80대 할아범이 있다고 말씀하시더니만, 요즘은 새벽 단장 시간이 평소보다 길어지신 건 살짝 여담이다.


3. 당신에게 등 돌린 사람들


할머니가 첫째 아들(큰 아빠)과 둘째 딸(큰 고모)과 등 돌리고 사신 세월은 꽤 길다. 실제로 큰 아빠와 큰 엄마는 수년에 한 번씩 안부인사 겸 짧은 전화를 할 뿐, 직접 할머니를 찾아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난 아주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재산 문제가 일부 얽혀 있다는 것쯤은 안다. 할머니는 가끔 저녁을 드시다가도 “그 배은망덕한 년놈들… 천하에 나쁜 놈들…” 하며 울컥울컥 하시곤 하셨다. 아주 연을 끊었다, 다신 낯짝들 안 볼거다, 하고 씩씩대며 방에 들어가시는 일도 부지기수셨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매번 명절마다 그분들의 전화를 누구보다 목 빼고 기다리신다는 걸. 몇 시간씩 전화기 앞에서 말없이 앉아 계신다는 걸.

그러나 전화가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편지도, 택배도 없었다. 할머니는 명절이 끝나갈 때마다 엄마한테 아주 작은 소리로 “며늘아, 혹시… 너한텐 전화 왔냐” 하고 물었다.

할머니가 그럴 때마다 가슴이 타들어갔던 엄마는 ‘그분들은 자식도 아니다, 그냥 기대하지 말고 잊으시라’ 하고 되려 화를 냈다. 매해 명절 마지막 날마다 불 꺼진 방에서 홀로 등 지신 채 눈물을 훔치시던 할머니. 한 번만 전화 걸어주시지… 그저, 사랑한다. 보고 싶다. 한 마디만 해주시지… 안부인 사라도 좋으니 편지 한 장 써주셨다면… 만일 큰 아빠랑 큰 엄마를 훗날 만나게 된다면 비록 버릇없을지라도 한 말씀드리고 싶다. “항상 기다리셨어요.”라고.


4. 당신에 대한 기억


할머니는 기억력이 많이 감퇴하셨다. 이미 1~2년부터 시작됐지만, 요즘은 한 번 알려드리면 30분도 채 안 돼서 다시 여쭤보신다. “그래서, 샴푸가 어떤 색 병에 있다고?” 하늘 밤이 긴 여름에는 자주 새벽에 깨셔서 내게 “아야, 지금이 아침이다냐, 아님 저녁이다냐?”하고 물으시기도 했다. 특히 할머니가 자주 잊어버리시는 건  ‘현관문 소리’다. 내가 외출할 때마다 “할머니, 나 다녀올게!”하고 크게 외치며 일부로 문을 쾅 닫고 나가도 똑같다. 귀가하면 할머니는 항상 “야아, 언제 나갔었냐.”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시곤 했다. 문제는 할머니는 엄마와 내가 밖에 일 보러 나가 있으면 항상 근심 걱정이 가득하다는 것. 엄마와 내가 각자의 방에 있어도 할머니는 느릿느릿 집 안을 지나다니시며 “며늘아, 너 집에 있냐.”, “여울아, 너 방에 있냐” 하고 꼭 확인하셨다. 이어 모두가 안전히 집에 있는 걸 확인한 뒤에야, 당신은 그제야 편한 얼굴로 방에 들어가신다.


할머니는 센터 선생님이 알려주신 듯 뽕짝 비스무리한 노래를 가끔 수줍게 열창하신다. 할머니가 자주 흥얼거리시는 십팔번은 두 번째 달의 ‘쑥대머리’ 다. 가끔 노래하는 모습을 내게 들키면 할머니는 ‘야야, 아직 안 나갔냐’ 하며 부끄러워하시곤 하셨다. 고음 부분을 부르실 때 큼큼 목을 가다듬으시는 모양새가 분명 소싯적 ‘낙안 꾀꼬리’였을 테다. 그런 할머니가 가장 챙겨보시는 프로는 당연지사 ‘전국 노래자랑’이다. 뭐가 그리 웃기신 지 ‘푸흐흐’ 웃다가 집 안 떠나가라 “여울아! 야아, 여울아!”하고 나를 부르신다. 뭔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라 달려가면 할머니는 허리 넘어져라 깔깔 웃으며 말씀하신다. “야야, 저 가스나 좀 봐라. 노래 부르는 게 아주 낙안의 자랑이여!”


할머니는 내가 식사를 했는지 자주 살피신다. 밥 먹기 전, 밥 먹는 중, 밥 먹은 후. “잘 챙겨 묵으라. 치킨 같은 걸로 속 배리지 말구.” 사실 식사하면 할머니와 얽힌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옛날에 할머니 집에 놀러 가면 당신은 아침이고 저녁이고 크게 크게 퍼 담은 흰쌀밥은 물론 군침도는 나물 밑반찬까지 척척 차려주셨다. 다만 지지리 편식하던 나와 동갑 사촌은 “나 콩나물 싫어, 안 먹어!”하고 팽하니 강아지랑 놀러 나가기 일쑤였다. 또, 명절 밤마다 엄마와 고모에게 등짝 맞아가며 치킨이 먹고 싶다고 노랠 부르기도 했다. 할머니는 “읍내에도 통닭은 안 팔던디”하며 손녀들에게 늘 미안한 기색을 내 비치 시셨다. 그리곤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며 흰 백숙 한 마리씩 내놓곤 하셨다. 엄마는 그때를 회상하며 “할머니가 얼마나 그 닭들을 애꼈는데. 근데 니네 양껏 먹으라고 할머니 입도 안 대셨다.”고 혀를 찼다. 지난주 저녁식사 무렵, 나는 오랜만에 “ 할머니가 해주던 백숙 먹고 싶어”하고 칭얼댔다. 할머니는 후후 웃더니 뒷짐 지시고 말씀하셨다. “이젠, 잡을 닭이 없어야. 한 마리두 없네….”


5. 당신의 기도


할머니는 항상 시침이 새벽 5시를 가리킬 때쯤 조용히 기상하신다. 그리곤 누룽지 한 그릇 끓여 드시고 복지센터에 가기 전까지 새벽 기도를 올리신다. 그리고 복지센터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신 뒤 오후 6시쯤 귀가하시면, 잠드실 때까지 뜨거운 물 한 잔 마시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소리 내어 읽으신다. 한 번은 할머니께 무슨 기도를 드리냐고 묻자, 당신은 쑥스러운 듯 후후 웃더니 말씀했다. “다 너를 위해서지. 여재(오빠)를 위해서고. 너네 아빠, 그리고 우리 며늘 아를 위해서지. 주님 사랑받고 살라고, 아주 분에 넘치게 받으라고 그리 기도드리제.”


할머니의 기도는 분명 효험이 있다, 고 당신은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도 신을 믿지 않은 채 살아왔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위해 한 평생 기도했다고 했다. 아무리 험한 말을 듣고, 무시를 당해도,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다. 그런 할머니의 기도가 통한 걸까, 할아버지는 임종 몇 시간을 앞둔 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셨다. 올해 여름, 여재 오빠가 첫 취업에 성공했을 때도 할머니는 방석을 박차고 일어나 “어이구야, 내 기도가 통한 것이여!” 하고 쾌재를 부르셨더랬다. 그러고 보니 선잠을 자던 새벽녘, 매일 가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조용히 부르시며 행복을 빌던 당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신의 가슴에 대 못을 박은 큰 아빠와 큰 고모의 이름까지 읊으며 새벽을 보내실 적엔 내 가슴도 쓰라렸다. 이젠 당신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해도 괜찮다고,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6. 할머니, 여울이에요.


사실, 할머니가 맨 처음 우리 집에 오시던 날.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셔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엄마가 괜히 고생을 더 하시진 않을까, 그런 마음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기우와 달리 할머니와 엄마는 마치 친모녀, 친자매처럼 매일 동거 동락하셨다.

엄마는 할머니로부터 삶의 따뜻함을 느꼈고, 할머니에게 엄마는 남은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주셨다. 그렇게, 낙엽 색깔처럼 다채롭고 진한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최근 할머니가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란 말을 자주 하신다. 엄마는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어유, 부정스러운 말 좀 그만해요!” 하고 버럭버럭 했다.

나도 “할머니, 내 토끼 같은 자식들까지 보셔야죠!” 하고 맞받아친다. 그럼 할머니는 흘흘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손을 내젓는다.


이젠 할머니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새벽녘의 기도소리도, 오후 6시면 울리는 도어록 소리도, 김이 나는 누룽지 그릇도, 똑똑 소리 나는 지팡이도, 전국 노래자랑을 보며 푸흐흐 웃으시는 당신의 뒷모습도. 당신이 없는 삶은, 이젠 따스하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결혼하고, 토끼 같은 자식들을 낳고, 그 애들이 또 결혼할 때까지. 그냥, 그때까지라도 할머니가 곁에 있으셨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정말 오랫동안, 당신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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