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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나들이

도심 속 쉼표 하나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한 남산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거대한 빌딩 숲과 차량의 행렬,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 사이에서도 남산은 묵묵히 숨을 고른다.


도심 한복판, 수많은 이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정작 남산의 고요함을 온전히 느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저 높은 곳에 세워진 타워와 야경의 배경으로만 기억되거나, 어린 시절 소풍의 장소로만 머물러 있던 산, 그러나 어느 순간, 나에게 남산은 '풍경'이 아니라 '이야기'로 다가왔다.


지난 10월 25일에는 "남산 하늘숲길"이 멋진 모습으로 시민 품에 안겼다. 남산도서관에서 출발해서 울긋불긋 치장한 단풍 감상하면서 편안하게 산책하다 보면 어느새 남산 중턱을 넘어선다.


동부이촌동으로 이사한 뒤, 문득 남산이 궁금해졌다. 젊은 시절엔 친구들과 또는 연인의 손을 잡고 오르던 데이트 코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이젠 남산을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걸어보는" "조깅하는" 사람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걸으며 듣는 새소리,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돌계단에 내려앉은 햇살 한 줄까지도 내 일상의 일부처럼 느끼고 싶었다.


걷는다는 건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멈추는 일이며, 생각하는 일이고, 오래된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다.


남산을 걷다 보면 발아래로는 도시의 소음이 깔려 있고, 머리 위로는 하늘이 열려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 길에서 나는 종종 발걸음을 늦춘다.


계단 끝에서, 벤치 옆 그늘에서, 나무의 숨결 사이에서 나는 지난날의 나를 다시 만난다. 한때는 앞만 보고 달렸던 시절이 있었다.


성취와 효율, 결과가 삶의 전부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그러나 남산의 길 위에서 나는 깨달았다.


세상의 속도와 무관하게 나만의 리듬으로 걸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이 조금 더 온전히 느껴진다는 것을.


남산의 오르막은 숨을 차게 하지만, 그 숨이야말로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는 고마운 신호 아닐까 싶다.


남산의 정상에 다다르면 서울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나는 그 광활한 풍경보다, 오히려 그곳까지 오르는 동안 마주한 작은 풍경들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된다.


돌담 옆 들꽃,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던 아파트 숲, 그리고 길모퉁이마다 앉아 쉬던 이름 모를 사람들, 그 하나하나가 내 하루를 단단히 채워주는 "조용한 풍경"이었다.


남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계절이 바뀌고 도시의 모습이 변해도 남산은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마치 우리가 잊고 있던 마음의 쉼표처럼.


언제든 마음이 복잡하거나 삶이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낄 때, 나는 다시 남산을 찾을 것이다. 남산은 기다리고 있으니까.


다가오는 이를 탓하지도, 떠나는 이를 붙잡지도 않은 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조용히 길을 내어주는 산.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 필자가 집필한 에세이 "남산 나들이"는 교보문고 등에서 e-Book으로 만나볼 수 있음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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