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내 자리가 더 이상 내 것 같지 않을 때가 있다.
XX기능 개선 프로젝트, 이런 계획으로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라고 열심히 준비한 내 보고는 무참히 까였다.
- 왜 XX기능을 개선해야 하죠?
- 네? 그야… 오래되었고… 불편하고…
이사님과 여러 인물들 앞에서 어버버… 어리바리한 신입처럼 멍 때리고 만 나.
뭐, 왜 개선해야 하냐니, 일리 있는 질문이었다.
XX기능은 누가 봐도 낡고 불편하긴 했지만 크리티컬한 불만(이거 당장 갈아엎어)을 들은 적은 없었다.
에러가 있으면 바로 고쳐 놓았고 쓰는 사람은 꾸준히 쓰는 그런 기능이었다.
하지만 왜 해야 하냐는 질문에 답변하지 못 한 나의 변명을 해 보자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XX를 개선하겠다 했을 때, 이사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XX를 개선하기 시작한 주 담당자는 다른 사람이었고 내가 중간에 바통 터치를 받은 것뿐이었다.
개선에 대한 근거는 이미 컨센서스가 맞춰진 게 아니었던가?
꼭 물건이 고장 나야만 새로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개선의 선이 착할 선 자를 쓰는 건 아십니까? 좋아진다는데 뭐 어때서요?
왜가 어딨나요. 인생 사는데도 이유가 없는데.
납득이 안되시면 이대로 평~생 아무것도 고치지 말고 그냥 쓰십시오.
괜히 태클 걸려서 심술궂어진 마음속에 반항하는 말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준비한 XX기능의 개선 제안은 개인적으론 지금보다 훨씬 개선되었고 좋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게 그게 좋은지 안 좋은 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이상한 제안이더라도 근거를 잘 세워서 근사한 말발로 어필했다면 더 성공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준비가 덜 된 것 같네요.라는 말로 발표 시간은 끝나버렸다.
주도적으로 뭔가 해보래서 해 본 결과가 이렇게 시작도 못하고 좌절되다니.
이럴 거면 왜 시킨 거야?
보고를 위해 준비한 시간이 무색해져서 사무실 자리에 앉아있기가 멋쩍었다.
난 그러한 스토리텔링에 매우 취약했다.
일반적으로 마케팅이라는 단어를 쓰곤 한다.
있어 보이게
납득이 가게
사고 싶게
유려한 말로 포장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마케팅을 못 한다.
취업 준비할 때 면접에서도 화려한 언변으로 면접관들을 휘어잡는 대신,
“저 말 잘 듣고 불평 없이 시킨 일 열심히 합니다”를 어필하곤 했었다.
소심하고 조용하고, 수동적으로 지내는 게 편하다 보니 좀 더 나서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도 낯설었다.
물론 회사 생활이 뜻대로만 되겠냐만은, 나설 때 안 나설 때 구분 못하고 구석에 최대한 숨어있는 게 일상인 나였다.
회사 입장에선 그래, 구석탱이에 처박혀서 일만 하고 있는데 좋게 볼 수는 없겠지.
하지만 용기 내서 내 행동반경을 좀 넓혀봤는데 이렇게 쌩 찬바람을 맞아버리면 또다시 움츠려 드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거절당한 느낌에 자존심에 스크래치는 덤.
고작 한 번 발표했다가 까인 걸로 대수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할 줄 알아야 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앞에서 스피치 하는 게 적성에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이런 앞에 나서는 발표라는 게 흔치도 않고, 굉장히 불편하면서 의미가 큰 이벤트라고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회사에서? 특히 나의 직종에서 흔한 일은 아니었다.
발표 같은 건 인싸들에게 맡겨두고 컴퓨터나 붙잡고 있으면 좋으련만...
머릿속의 감정은 회오리쳐 극단적인 방향으로 향해 가는데, 나는 본디 부정적인 면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안 좋은 기억을 훌훌 털어 넘기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번뇌하는 것에 더 가속도가 쉽게 붙었다.
회사 생활이 몇 년 찬데 이깟 발표도 제대로 못하고.
발표를 못 한 건 둘째 치고, 이렇게까지 심리적으로 타격을 받아버리다니.
이렇게 소심해서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
괜히 머쓱했던 마음이 서운해지고, 불편해지고, 서러워지고,
눈물을 참느라 머리가 아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 회사랑 안 맞나 봐...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이런 숫기없는 소심쟁이같으니.
나 어떡하지...?
앞으로 어떻게 이 험난한 삶을 살아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