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혼자서 대학등록금과 월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수능 실패 이후에 유사종교(*당사자가 단체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음)에 빠져 있던 누나는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결국 진학을 포기한 나는 어차피 유명하지 않은 대학이라고, 내 까짓 게 무슨 대학이냐고 되뇌며 스스로를 깎아내리다가 돈이나 벌기로 마음먹고는 독서실 총무가 되었다. 한 달에 150시간 이상 카운터를 지키면서도 25만 원밖에 받지 못했던 그 일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에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내가 그나마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뭔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9개월 동안이나 계속했던 그 일이 내 알바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다음 해에는 운 좋게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긴 했지만, 그 뒤로도 알바는 쉬지 않았다.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는 동안 야간 편의점, 구내식당, 고깃집, 전단지 부착 및 배부, 도시락 배달처럼 진입장벽이 낮은 알바부터 물놀이 안전요원, 토익사관학교 조교, 지역아동센터 선생님, 19금 웹 소설 교정, 어르신 생애출판사업 멘토 같은 비교적 희소한 알바들도 경험했다. 애써 찾아가서 보게 된 알바 면접에서 떨어진 적은 50번도 넘는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불우한 가정형편이나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알바를 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나중에는 그마저도 관두게 되었다. 살면서 한 번도 잘 풀리지 않았던 새로 계획한 소설들처럼 처지를 비관하는 태도도 실익이 없다는 생각에 버리고 만 것인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 이유가 다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희망을 아예 품지 않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알바를 그저 인생에서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으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알바 하는 나 또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돼버린다는 자각을 늘 갖고 있었다. 임금 미지급이나 근로계약서 거부, 구두 계약 파기, 폭언과 성추행 등 좀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겪고 나서도 시간이 지나면 깨달음이 남을 거라고 되뇌며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선한 영향력을 준 배울 점 많았던 사수들과 동료들을 만나고, 저소득, 한부모 가정 아동들과 애틋한 만남과 이별을 하고, 죽기 전에 유서 같은 글 한 편을 남기기를 바라시는 어르신들에게 글쓰기를 알려드리고, 때로는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짝사랑을 경험하면서 못난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고생해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깨달음과 반성의 순간이 내게도 분명 있었다. 그동안 몰랐던 사회 문제를 체감하고, 고된 노동 끝에 늘 살아 있음을 일깨워주는 감정을 느끼고, 사회 안에서 내 고유한 위치를 찾아 진로와 직업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다 알바 일을 통해혹은 알바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배운 덕분이었다. 오랫동안 글 쓰며 살다 보니 현장에서 배우고 느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도 마음 한구석에 늘 간직하고 있었다. 이 글의 서론에서 밝힌 것처럼 특별한 감정과 영감을 꼭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떠나야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바람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런 바람들을 애초에 마음 속에 품고 있지 않았더라면 오랜 기간의 집필 끝에 완성한 이 책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다고 결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심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물론 28년의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열 가지 유형의 알바와 오랜 소설 쓰기 경력만을 가진 내 사연이 누구나 놀라고 감동 받을 만한 특별한 이야기라는 생각은 지금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 딴에는 청춘의 우울한 시기를 여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깨달음과 감정들, 그리고 편하게 해외여행 다니는 잘 난 사람들은 쓸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느 책보다도 소중하다. 책을 읽은 독자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에 내가 ‘여행의 이유’ 책을 읽고 불행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처럼, 부디 내 책 또한 사람들의 삶의 여정에 작은 도움과 위로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게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남들보다 특히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여운과 울림을 더 주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ps. 길게 쓰는 병이 또 도졌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