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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마시타 Apr 04. 2020

뉴 이탈리

나도 그렇게 모험을 시작한 것일까?

이 기행문은 사진도 없고, 기억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곳에 다녀온 지 너무 오래됐습니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앞으로 알려질 가능성도 전무하다고 봅니다.


New Italy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습니다. 호주의 뉴사우스 웨일스 주에 속해 있으나 큰 의미가 없습니다. 같은 주의 주도인 시드니에서 693km 떨어져 있고, 결정적으로 마을 인구가 187명입니다. 지금 저는 한국으로 치자면 대한민국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상동마을 (약 50가구, 인구 100명 내외) 같은 곳에 관해서 글을 쓰려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가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을 곳에 관해서요.


북쪽은 동토라서 개발이 이뤄지기 힘든 캐나다처럼, 호주의 중앙부는 메마른 불모지(사막 혹은 아웃백_스테끼 집 말고요..)입니다. 물론 우리네 같이 콘크리트에서 잉태한 영혼들에게만 그래 보일 뿐이지, 그곳도 그곳만의 삶이 확고합니다. 일견 붉은 먼지 구덩이로만 보이는 이 아웃백 관련해서도 기행문을 하나 쓰면 재밌을 것 같군요. 하지만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물을 구하기 쉽고, 기후가 온화한 해안가를 중심으로 호주 대륙이 개발된 것은 사실입니다. 주요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시드니, 브리즈번, 멜버른, 애들레이드, 퍼스 모두 해안가에 있죠. 호주 대륙을 해안가 따라 한 바퀴 뺑 두르는 1번 하이웨이가 있는데, 언급한 모든 도시가 이 도로 선상에 있습니다.


뉴 이탈리는 그 길옆에 있습니다. 그러니깐 제가 들렸죠. 브리즈번에서 출발하여 남쪽 시드니로 가다가 운전에 지친다 싶으면, 이곳 표지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포도주 양조장과 카페테리아가 표지판에 함께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름에서 쉬이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마을은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세운 마을입니다. 차에 내려, 마을에 들어서면 조그맣지만 정취 있는 카페테리아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카페테리아 입구는 온통 포도 넝쿨로 감겨 있습니다. 어렸을 때, 왜 학교 운동장 한편에 자리 잡은 등나무 넝쿨이 만들어주던 그늘 기억나시나요? 딱, 그런 느낌으로 무성하게 포도 넝쿨이 카페테리아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주변을 서서히 둘러 걸어 봅니다. 너무 작은 마을이라, 무척이나 적막합니다. 이곳 역시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소규모 와이너리를 지키는 늙은 농부 정도만 남았습니다. 카페테리아에는 저처럼 운전에 지친 심신을 위안받으려는 몇 여행자들만이, 따사로운 햇살을 피해 포도 넝쿨 그늘에 그저 멍하게 앉아 있습니다. 포도밭에서 일하다가 와서 그런지 이곳의 포도나무들이 가지치기, 잎 솎아내기 등의 관리가 무척이나 잘 되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햇살에 살짝 드러난 포도는 아주 잘 영글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박물관도 있습니다. 식민지에서 약탈한 남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서양의 거대 유명 박물관과는 다르게, 이 마을의 초기 이주 역사에 관한 소박한 박물관입니다. 한국 시골에 으레 하나 있는 마을 회관 같은 규모입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그곳에 들어섰다가 마을의 역사를 접합니다.


독재자가 없는 정치적 자유 기반 위에 주인 없는 비옥한 땅을 나눠 준다는 광고를 보고, 약 300명의 이탈리아인이 1880년 “인디언 호”를 타고 유럽에서 출발합니다. 광고에는 행선지가 파푸아 뉴기니의 어느 조그만 섬으로 향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 반년에 걸친 항해 끝에 막상 도착한 그곳은 불모의 땅. 굶주림과 병마에 지친 이들은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호주 뉴사우스 웨일스로 일종의 집단 망명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허가된 땅이 지금의 뉴 이탈리입니다. 처음 출발 시 300명이던 인원은 1년의 방황 끝에 호주에 상륙 시 2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린, 첫째, 약 150년 전에도, 이민 사기가 횡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66% 남짓한 생존율에서 보듯이 이민이란 굉장한 하이 리스크를 수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이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 내내.


한 개인에게 이민이란 성공과 실패가 명확합니다. 당장 저처럼 3년 워크퍼밋 하나 믿고 버티고 있는 이에겐 실패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영주권을 못 받는 순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여기서 써 버린 돈을 만회 못 해서 빈민으로 쭉 살겠지요.


그래도 말입니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저는 그저 인간의 본능적 욕망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더 나은 곳이 있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였을지라도, 어쩌겠습니까. 인간의 유전자가 그런 방향으로 진화해 왔을 뿐이라고 변명해봅니다.


다시 찾기 어렵겠지만 제 남은 인생에서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나이가 들면 언젠가는 뉴 이탈리의 한적한 카페에 앉아, 이민에 도전했던 내 삶의 지난 과정을 꼭 반추해보고 싶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마을이지만, 이탈리아인들의 후예답게 커피 맛은 아주 훌륭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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