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독립출판물로 취급해주나요?_03
올해부터는 20대 중반. 24세
제가 어릴 적부터 생각해온 어른의 나이입니다.
올해, 저는 처음으로 20대 중반을 맞이합니다.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졸업 요건을 모두 충족하면 졸업 유예 신청을 해서라도 해외여행을 다녀와야지라던가. 배우고 싶었던 것 배울 학원이나 다녀보자.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요. 졸업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나니, 전에 스스로와 약속했던 것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물론 간단히 생각하면, '1년간은 참고, 그동안 알바 미친 듯이 해서 해외여행 한 번 갔다 오자!'라고 생각할 수 도 있는 문제입니다. 근데 그게 쉽나요.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죠. 힘들게 졸업 조건들 충족시키고 나니, 통장은 비어있고.... 의욕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그냥, '1년간 알바는 무슨, 그냥 졸업 미루지 말고 바로 취업준비나 하자.' 하고 알바와 취업준비를 병행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 었던 졸업 전시회가 무사히 끝이 난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이제는 하고 싶었던 것들을 좀 해보자 하며 독서도 전보다 꾸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외여행 같은 강렬한 힐링 거리는 안 되겠지만, 가끔 제 취향을 저격하거나 제 영감 주머니에 들어오겠다며 딱딱한 주머니 벽을 오물조물 주무르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물조물 주무르다 보니, 사소한 자극에도 제 머릿속은 금방 새로운 기분들로 가득 찼습니다. 평소에는 그저 지나치는 배경 같았던 것들이 제 눈 안에 메인 피사체로 들어찼습니다. 또 "나도 있었어!" 하면서요.
요새 집 밖으로 나가는 일들을 자제하니 제 눈 속에 첫 타자로 들어찬 아이들은 가족과의 일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끝내고 와 거실에서의 행동 패턴부터 동생이 주말 알바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의 표정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실 때 현관문에서 신발을 벗을 때. 그리고 오늘은 어머니의 새치 염색을 해드렸습니다. 이 전에도 몇 번 어머니의 새치 염색을 해드렸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점점 새치 염색의 주기가 짧아지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며칠 전 스타벅스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을 때 잠시 어머니가 고개를 숙이는 찰나에 보였던 어머니의 정수리에 있던 수많은 새치들도 떠올랐습니다.
염색용 장갑을 끼고 어머니 목에 옷에 염색약이 묻는 걸 방지하기 위해 비닐을 묶을 때는 전에는 거의 나지 않았던 이모할머니 댁의 냄새가 났습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에게 나는 냄새 비스무리한 것 말입니다. 10년 전. 정말 오랜만에 목포에 있는 이모할머니 댁에 갔을 때, 이모할머니의 냄새가 너무나 친근하고 푸근해서 할머니의 냄새가 더 많이 나는 이불을 골라 자기도 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 엄마한테는 이런 냄새가 안 나면 좋겠다. 최대한 늦게 나면 좋겠다.' 했었습니다. 어머니가 나이가 드는 게 너무 싫었으니까요.
막상 어머니한테서 그런 냄새가 나는 걸 맡고 나니, 그때 느꼈던 포근함은 없었고, 우리 엄마가 이렇게 나이 들었다고? 하는 낯선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졸업할 나이가 되고, 20대 중반이 되는 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지만, 어머니가 나이 들어가는 것은 내가 한 살씩 나이 먹어가는 세상과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 마냥 이질적입니다.
'노인 일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인을 감정이 있고 개성이 있는 유기체로 보는 것이 아닌, 나이 든 사람이라는 집단적 정체성만이 전부인 것으로 치부하는. 일종의 편견 속에 가두어 버리는 '폭력'인 것입니다. 새치를 염색하는 동안 어머니가 나이 듦에 따라 점점 어머니의 정체성이 아닌 그저 노인으로 보는 나의 시선이 '노인 일반'과 어머니를 자꾸 같은 선상에 두고 보려고 하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되니 자꾸 이질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노화가 되어가는 것 등 때문에 본인의 무언가가 자꾸 상실되어 간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실은 느껴지는 것들도, 알게 되는 것들도 더욱더 많아지고, 갖게 되는 것도 다양해질 텐데 말이죠.
'노인'하면 가장 대표적인 편견인 2가지. 남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당신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폄하적인 시선과, 나이가 들어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동정의 시선. 이 두 가지 시선이 아닌 그저 나와 같이 성숙해지고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는 시선으로 보는 섬세한 공감이 필요합니다. 당장 제 바로 옆에 있는 어머니. 저 본인도 노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으니까요.
노인, 어머니. 그리고 저에게도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이 글은 이·독·취의 '누군가'에 대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소개의 글에서의 '누군가'는 시간에 대한 공부. 실전단계 수업을 배우고 있는 '노인'입니다. 첫 번째 글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는 과정을 선명하게 느낀 날을 기록했구요. 그 글로 시간에 대한 생각을 조금 정리한 다음, 후의 두 개의 글에서는 흘러가는 시간을 그 무엇보다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직관적으로 느낀 점들을 기록했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시간 수업 응용반'을 수강할 테니, 노인과 우리 모두를 위한 글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