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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 Jan 07. 2024

명함의 의미

도시를 떠나 산골로 오니 그 반대가 되는군요. 일로 얽힌 번다한 관계가 떨어져 나가는 대신 이웃과 사귀는 친밀한 관계가 맺어집니다. 관계가 좁고 깊어지는 거지요. 이웃끼리 만나는 데 구태여 명함을 주고받지 않습니다.. 계급장 떼고 그냥 맨몸으로 만납니다. 그런데 나에겐 그게 어색했지요. ..남남 말고 우리로 만나는 일에 나는 무척 서툴더군요. 나의 만남은 늘 용무를 밝히는 자리였지 나를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만 벌고 편히 살기, 김영권, 북랩- 



 

학생 때는 명함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회사 생활을 하며 내 이름이 찍힌 명함을 받았을 때 벅차던 감정이 기억난다. **자동차 사원 ***, 명함 만으로도 뭔가 꿈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엄연한 사회 구성원이 된 것 같았다. 그 후 직장 생활을 한 이후부터 명함은 나를 규정하는 하나의 큰 틀이었다. 어디를 가서 명함을 내미는 일은 나의 존재를 표시하는 일이었고 회사를 나오기 전 겨우 차장 나부랭이라며 입을 내밀 때도 명함에 기대고 있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걸 깨달은 것은 역시 그것을 벗어던졌을 때이다. 명함만 내미면 설명이 필요 없는 대기업의 그늘에서 벗어나자 명함의 의미를 아니 그 큰 그늘의 의미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내 선택에 의해서였다고 초라해질 필요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럴싸한 명함이 사라지자 나는 쪼그라들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설명하는 게 구구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반려견을 가족으로 맞이하고, 동네 수영장을 일 년째 다니기 시작하며 동네에 아는 사람들이 생겼다. 지나가며 만나는 사람 중에 낯익은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동안 전세로 이 년마다 한 번씩 집을 옮겨 다녔고 회사 다니며 아침저녁만 동네에 출몰하기에 동네에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했지만, 이제 동네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외에 아는 얼굴이 있다는 게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심지어 이 낯선 사람들과 대화도 한다. 아이가 몇 살인지 눈물자국은 어떻게 지워야 하는지 간식은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등 이런저런 대화를 한다. 사회생활 때 애쓰고 노력하며 키우던 사회성이 이제야 자연스럽게 길러지기 시작했다.


수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거의 일 년 만에 송년회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거의 맨몸으로 만나는 것과 다름없는 수영장 사람들은 더 진솔한 느낌이 든다. 화장 안 한 맨 얼굴, 서로의 몸매를 적나라하게 아는 사람들. 하지만 그것에 크게 관심이 없고 그저 수영장 순번만 중요한 관계. 모이면 수영 얘기를 하는 관계. 이런 관계에서는 뭐 하는 분이에요를 대놓고 묻지 않는다. 반려견의 부드러운 털과 깔끔한 눈이 궁금하고 수영장 동료가 이렇게 수영을 잘하게 된 비결이 먼저 궁금하다. 회사 관계로 만나 힘을 주어야 했고 이런저런 계산을 하며 만났던 관계와는 다른 느낌. 


회사를 떠난 후 몇 개월 뒤 명함 정리를 하며 대부분의 관계가 정리되었음을 알았다. 회사 관계에서 주고받은 명함은 그 회사에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회사 관계가 정리되자 그 안의 수많은 명함들도 같이 정리되었다. 명함을 주고받지 않는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도 이 동네를 떠나면 정리될 것이다. 뭐 꼭 관계가 길게 유지되어야 좋은 것은 아니겠지. 모였다 흩어지고 오고 가는 게 사람 관계이니.  


사람 관계는 항상 어렵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회사 다닐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동네에 또 다른 관계가 생기는 기분은 참 좋다. 뭔가 아는 얼굴이 있으니 제2의 고향 같은 느낌도 든다. 사실 제1의 고향이 어디일까 싶기는 하다. 물리적으로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에는 이제 아는 얼굴이 거의 없으니. 


예쁜 함박눈이 내린 저녁을 보낸 아침, 앞마당이라도 쓸고 싶지만 아파트라 앞마당이 없으니 눈이 내린 동네 공원에서 반려견과 뛰어놀아야겠다. 아는 얼굴 찾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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