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추억
오래전 여행이 간절했던 시기에는, 한 번의 여행을 위해 오직 떠날 날만을 기다리면서 모든 일상을 여행에 맞춰 사는 그런 때도 있었다. 숨쉬는 매 순간마다 떠날 날을 기다렸다면 믿을까. 하지만 이제는 여행에서 별다른 느낌 혹은 감흥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맥빠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스스로도 참 많이 놀란다. 그만큼 바싹 마른 상태, 결핍이 있는 상태에서 떠난 여행이 아니어서였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느만큼을 채워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형편없어진 여행을 대하는 태도 앞에서 새삼 놀란다.
출처:혼자가 혼자에게, 이병률, 달출판사
작년 12월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회사 다닐 때 휴가를 기다리던 것처럼 간절하게 기다리며 설레는 여행은 아니었다. 9월 퇴사 후 10월 산티아고를 다녀왔고 두 달간 프리랜서 준비를 하면서 진척 없는 준비와 조급한 마음의 급락을 오가다 갑자기 떠나고 싶어졌다. 그 시기에 갈 만한 멀지 않고 걷기 좋은 길이 많고 예산이 적절한 곳을 찾아보다가 스카이스캐너에서 싼 오키나와 비행기표를 발견하여 떠나게 되었다.
오키나와. 여러 번 갈까 했지만 이리저리 피해가게 되었던 곳. 오키나와라는 지명만으로도 뭔가 따뜻한 바람과 푸른 바닷빛이 떠오르며 가슴속을 간질간질하게 만들던 곳. 일본이지만 일본답지 않다는 그곳. 그 오키나와에 이렇게 가게 되는구나라며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쌓다.
멀지 않은 시간의 비행 끝에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12월의 오키나와, 내게 허락된 6일간. 비행기에서 내리자 내가 생각했던 쨍한 햇빛이 아닌 흐린 하늘이 나를 맞이했다. 순간 불안한 마음에 날씨를 검색했다. 내가 있는 기간 내내 구름, 흐림, 비였다. 날씨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그래도 잘 즐겨보자라는 생각을 했지만 실망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날씨에 매우 민감하다. 쨍한 날씨에서는 의욕이 샘솟지만 흐린 날씨에는 몸을 꼼짝도 하기 싫고 우울감이 바닥을 치고 만다. 그런데 이곳에서 6일 내내 흐린 날씨와 싸워야 한다니 불안감이 맴돌았다.
결국 나는 날씨에 졌다. 우중충한 하늘빛은 모든 의욕을 앗아갔다.
온통 도시는 흐린 하늘과 축 처진 공기였고 에메랄드 바다도 흐린 하늘 아래서는 그 색을 드러내지 못했다. 도시 위를 다니는 모노레일의 유리창은 온통 까만색 점들로 되어 있어(아마도 햇빛이 강한 날의 햇빛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흐린 바깥 풍경을 더욱 우중충하게 만들고 있었다.
혼자 간 오키나와에서 맛있는 식당을 혼자 갈 생각이 아니 의욕이 들지 않아 매일 저녁은 편의점에서 초밥, 사시미, 샐러드, 도시락을 번갈아 사서 호텔에서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먹었다.
좋은 풍경에서 많이 걷고 싶다는 생각으로 갔건만 생각보다 오키나와에는 걸을 만한 길이 많지 않았다.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은 많았지만 도보 길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거의 나하 시내에서만 왔다 갔다 하면서 서점, 도서관 탐방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쇼핑의 욕구마저 들지 않아 기념품 하나를 사지 않았다.
매일매일 그날 호텔을 정해서 숙박을 하다 보니 숙소 상태에 따라 우울감이 더 커지는 날도 있었다. 물론 잠깐의 기쁨을 선사하는 곳도 있었다.
심지어 그냥 갈까 하는 생각에 비행기표를 검색하기조차 했다. 항공편을 바꾸는 값이 새로 사는 값과 같아서 결국 그냥 포기하는 마음으로 6일을 꾸역꾸역 있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때는 아침을 먹던 순간이었다. 밤의 어둠이 지나간 뒤 오늘의 아침은 무슨 맛일까라며 부드럽고 푹신한 일본 식빵을 먹던 그 순간이 그나마 가장 여행 중에 설레이던 시간이었다. 호텔 근처의 구글에서 평점이 높은 아침 파는 곳에서 먹은 셋트 A는 일본스러운 자그마한 접시에 식빵과 샐러드, 계란, 의외의 팥으로 달달한 아침을 선사했고, 사원 가는 길에 있던 레뜨로 컨셉의 커피숍에서는 계란과 치즈가 듬뿍 올려져 있는 도톰한 식빵은 왜 타바스코 소스를 같이 주었는지를 알게 해 준 맛이었다. 나하 시내에 있던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침을 먹고 있어 들어간 커피숍에서는 오믈렛과 적당히 구워진 토스트가 깔끔한 커피와 함께 나왔다.
점심으로 해군 기지가 있는 바닷가에서 오랫만에 햇빛이 든 오후에 테라스에서 피자를 시켜 먹던 순간도 기억난다. 결국 기억에 남은 건 음식뿐.
가장 신나는 날은 돌아가는 날이었다. 6일 동안 혼자 재밌게 보내지 못한 시간들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날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여행에서 신나는 날이었다. 공항에서 뒤늦게 오키나와 명물이라는 아이스크림과 일본 맥주를 마시며 돌아가는 날을 자축했다. 돌아가는 날마저 하늘은 잔뜩 흐려이었는데 구름 위로 올라가니 그토록 보고 싶던 선명한 하늘이 보인다. 이제 곧 서울이다!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거나 여행을 꼭 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없이 그냥 출발한 것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이 때문일까 맥 빠진 여행이 이런 거구나를 절실하게 경험했다. 이런 여행은 돈만 공중에 날릴 뿐 아니라 시간과 의욕마저 뺏어가 버리는 여행이었다. 이병률 작가의 혼자가 혼자에게를 읽으며 나에게 그때 결핍이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싹 마른 상태, 결핍이 있는 상태에서의 여행이 나를 불타게 하고 결핍을 채워주는 엔도르핀을 만드는 것인데 그때 나는 바싹 말라있지도 결핍이 있지도 않은 지리한 상태에서 여행을 떠나니 결국 지리한 여행을 하고 돌아왔던 것이구나하고.
그래서 이제는 여행을 떠나는 시점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을 세워본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가 아니라 바싹 말랐을 때, 결핍이 있을 때 여행을 떠나자라고. 오히려 프리랜서로 시간의 여유를 만들 수 있는 요즘에 시간만 생기면 여행 가야지 하던 직장인 시절보다 여행 생각이 줄었다. 이 얘기는 내가 그때만큼 바싹 마르거나 결핍이 있지 않다는 것이기도 할 테다. 여행으로라도 무언가 속에서 느껴지는 허기를 채워야 했던 그때보다 허기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언젠가 또 이 생활이 익숙해져서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으로 바싹 마르거나 이 생활에 답이 안 나와 갈증으로 바싹 말라서 정말 여행이 필요할 때 또 가방을 싸겠지. 잔잔한 바다가 아닌 파도가 있을 때 파도를 타고 넘기 위해 여행 가방을 다시 꺼내겠구나.
그때까지 나는 얌전히 일상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