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사람은 논외다.
유감스럽게도, 그냥 조용하기만 한 사람과 재미가 없는 사람은 분명 다르다.
조용한데도 간헐적으로 큰 웃음을 주는 사람이 꽤 많기 때문이다. 이들의 유머는 일반인보다 훨씬 농도가 짙어 차라리 진국에 가깝다. 적은 말로도 주변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대단한 능력자인 것이다.
이와 달리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고해서 반드시 조용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 되었든 우선 뱉어낸다.
무언가를 뱉어내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기에, 사실 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유머(humor)가 대체 뭐길래?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유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었다.
우스운 이야기란 사고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도록 정해주고 나서 막판에 예상 밖의 것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균형의 상실을 야기합니다. 이를테면 정신이 발을 헛디디고 쓰러지는 셈이죠. 정신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일단 사고의 흐름을 차단하고 시간을 벌려고 합니다.
아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실은 유머편이다.
엄마 낙타와 아기 낙타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기 낙타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왜 큰 발톱이 세 개나 있어?" "아가, 그건 우리가 사막을 걸을 때 모래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있단다." 아기 낙타가 다시 물었다. "엄마, 그럼 내 길다란 눈썹은 왜 있어?" "아가, 그건 우리가 사막을 여행할 때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우리 눈을 보호해준단다." 아기 낙타가 또 물었다. "엄마, 그럼 내 등에 큰 혹은 왜 있는 거야?" "아가, 그건 우리가 사막을 오래 여행할 때 섭취할 양분을 그곳에 저장해 놓는단다." 아기 낙타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엄마! 그럼 우리는 동물원에서 뭐하는 거야?"
유머를 구성하는 형식은 쉽게 말해, X와 Y의 비논리적인 결합 혹은 부분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X에서 X로 이어지는 편안한 흐름에 갑작스레 Y가 끼어듦으로써 뇌 속에 혼란과 긴장을 야기하고, 이것이 이내 자연스럽게 웃음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적절한 예시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볍게 충청도 유머를 한 번 살펴보자.
예시는 ‘돌아가셨습니다’의 각 지방별 표현들이다.
표준어: 돌아가셨습니다.
경상도: 죽었다아임니꺼.
전라도: 죽어버렸어라.
충청도: 갔슈.
'갔슈.'를 보자마자 실소가 나오는 이유는, 표준어 경상도 그리고 전라도 표현들(X값들)에 비해 갑작스레 끼어 든 충청도 표현(Y값)이 유난히 짧고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머 감각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비논리적인 연결 관계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로 정의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나 표현이 담긴 애드리브는 언어의 형식에 있어 이러한 연결을 무척 중요하게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순간적인 비합리적 연결은 현재 대화의 흐름과 상황에 대한 엄청난 단기 집중력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에, 이는 기실 능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대단하게 피로한 지적 노동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재밌는 사람은 성실하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반대로 비논리적인 연결고리를 인식하는 데 매우 둔감한 편의 사람은 이런 유머에 도리어 화를 낸다.
“‘갔슈’가 분명히 정확한 충청도 방언이 맞는데, 이게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건데?”
라고 되묻는 경우가 되시겠다.
이 부류는 차라리 귀엽다. 그저 웃음의 타이밍이 조금 늦을 뿐이다.
그러나 기필코 문제가 되는 대표적인 두 사례는 아래와 같다.
1. 한 숟갈 더 올리는 유형
기어코 한 마디를 보태서 본인도 웃음꾼이 되고 싶은 유형이 되시겠다.
대화가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유형이다.
- 중국인은 뭐라고 하게?
- 뭔...데요? (불안하지만 마음씨는 착한 누군가가 집단 속에 항상 한 명은 있기 마련이다.)
- 갔다해~
이들은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데 딱 절반 만큼만 있기에 오히려 괴로운 유형인데, 해당 대화는 이미 X-> Y로의 전환을 끝낸 상태이다. Y로 끝난 대화에 Y를 부득이 또 끼얹었으니 분위기는 삭막해지는 길만 남은 셈이다.
2. 사회적 눈치가 없는 유형
단순히 X와 Y가 비논리적으로 연결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유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사회심리학적 요소가 무척 강하게 작용한다.
만일 해당 예시에 악플러: 죽었네ㅋㅋ를 넣게 되면 갑자기 분위기는 싸한 정도를 넘어 순식 간에 아침드라마가 되어버린다. 이질적인 Y값은 맞지만, 사회적인 허용 정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무엇이 성희롱이 되고, 모욕죄가 되고, 한 사람을 재미없는 사람으로 만드는지는 사실 이 사회심리학적 기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비논리적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사회적 용인의 정도에도 민감한 사람이어야 비로소 ‘재미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유명 방송인들은 특히 이런 범주에서만큼은 범접할 수 없는 프로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재미없는 사람에서만큼은 벗어나는 방법!
타고나게 이런 민감한 사회적 용인의 정도를 넘나들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있다.
이는 노력만큼이나 타고난 능력에 준하기에 사실 무척 부러운 영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은 그냥 관찰하는 것이다.
나의 사회 생활이 1-2년으로 끝날 것도 아닌데, 굳이 오늘의 대화에서 너무 욕심부릴 필요는 없다.
재미있는 사람이 하는 말들을 잘 지켜보면서 그들이 어느 지점 정도에서 선을 두는지, 어디에 힘을 주는지 관찰하고 공부해보면 생각보다 기준을 설정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한마디 정도 참고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공부가 될 것이다.
웃음이란 생리적으로 참 신기한 영역이다.
이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비참한 감정을 만들기도한다. 예컨대, 나를 무척 혼내시는 선생님의 이빨에 고추가루 하나가 월세를 내고 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과 혼이 나고 있다는 상황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입을 벌리실때마다 존재를 알리는 선명하고 분명한 고춧가루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Y값이다.
그러나 해당 상황은 사회적으로 유머가 전혀 용인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아마 많은 이들은 끝끝내 웃고 말 것이다. 대뇌 회로와 호르몬의 비참한 장난인 것이다. 사실 나의 고등학교 경험담이다. 당시 선생님도 이것이 나의 잘못이 아닌 대뇌의 장난이라는 걸 아셨는지 머리를 집중적으로 때리셨던 기억이 난다.
재미있는 사람은 어쩌면 타고난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노력은 최소한 나를 재미없는 사람이 되지는 않게끔은 만들어줄 수 있다.
그러니 너무 욕심내지 말되, 아주 작은 노력 정도는 하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