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건 나야!
사랑과 기쁨 같은 감정 표현은 나이가 들수록 메말라만가는데, 힘듦을 이야기할 때 만큼은 누구나 문학도가 된다.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무척 어려운 사회가 됐다.
누구나 저마다의 힘들었던 과거를 안고 사는 법인데,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어려움을 타인과는 비교도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불행함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 나 어렸을 때는 정말 너무 가난해서 말이야
- 군대 있을 때 내가 진짜 죽을 정도로 고생을 했는데
- 너가 당한 건 괴롭힘도 아니야. 나는 옛날에
- 너는 결혼 잘해서 좋겠다야. 내 와이프는 진짜
불행함에도 레벨이 있다면, ‘겸손이 미덕이다.’라는 문장만으로는 다소 부족하고 민망한 이런 대화가 우리의 일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너보다는 괴로운 삶이고 싶어!
노예가 노예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서로의 쇠고랑을 자랑하게 된단다. 부정적인 인식과 감각에만 예민해진 우리는, 마치 너의 괴로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서로의 쇠고랑을 더 높이 들어올리지 못해 안달이다. 내 친구의, 부장님의, 혹은 어쩌다 마주친 303호 주민의 삶보다 내 삶이 더 편안해서는 안될 것만 같다.
분명히, 우리는 이상하고 괴로운 강박에 시달리면서 살고있다.
왜 나도 모르게 나의 힘듦을 과대포장하게 될까?
나의 과거를 타인의 삶에 비해 ‘유독’ 고통스러웠던 순간으로 만들면 얻게 되는 성취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1. 타인의 성취를 그저 운칠기삼에 불과한 정도로 만들 수 있다.
2. 잘 풀리지 않고 있는 현재의 삶에 거대한 면죄부를 안겨줄 수 있다.
3. 생각보다 인생이 잘 풀려갈 때 사람들의 시기질투로부터 보다 안전할 수 있다.
행복이란 것에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수치가 없는 것처럼, 불행도 이와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우리네 인생에 행복과 불행만큼이나 상대적인 개념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다. 전교 1등도 건물 옥상에 올라가고,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대기업 임원이나 정치권의 중직 인사들이 검찰 조사 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현대인을 채우고 있는 자존감은 어쩌면 무척이나 연약한 기반 위에 겨우 그 존재를 붙이고 서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본인을 조금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리고 그런 식으로 위태로운 자존감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탠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닌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마약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이를 전혀 권면하지 않고 싶은 이유는, 마약과 닮은 점이 참 많기 때문이다. 이런 요식 행위는 결국 겨우 순간만 구제해줄 뿐이다. 한정된 과거는 소비하면 할수록 공허해져버린 내면을 더욱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어서 내가 살아가야 할 현재는 매 초, 매 순간 나를 부지런히도 껴안는다. 내게 필요한 것이 더 나아진 미래라면 더욱이 이를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