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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Nov 09. 2020

왜 불행한 사람만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건 나야!



  사랑과 기쁨 같은 감정 표현은 나이가 들수록 메말라만가는데, 힘듦을 이야기할 때 만큼은 누구나 문학도가 된다.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무척 어려운 사회가 됐다.


  누구나 저마다의 힘들었던 과거안고 사는 법인데,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어려움을 타인과는 비교도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불행함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 어렸을 때는 정말 너무 가난해서 말이야

 - 군대 있을 때 내가 진짜 죽을 정도로 고생을 했는데

 - 너가 당한 건 괴롭힘도 아니야. 나는 옛날에

 - 너는 결혼 잘해서 좋겠다야. 내 와이프는 진짜


 불행함에도 레벨이 있다면, ‘겸손이 미덕이다.’라는 문장만으로는 다소 부족하고 민망한 이런 대화가 우리의 일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너보다는 괴로운 삶이고 싶어!


 노예가 노예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서로의 쇠고랑을 자랑하게 된단다. 부정적인 인식과 감각에만 예민해진 우리는, 마치 너의 괴로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서로의 쇠고랑을 더 높이 들어올리지 못해 안달이다. 내 친구의, 부장님의, 혹은 어쩌다 마주친 303호 주민의 삶보다 내 삶이 더 편안해서는 안될 것만 같다.


분명히, 우리는 이상하고 괴로운 강박에 시달리면서 살고있.




왜 나도 모르게 나의 힘듦을 과대포장하게 될까?

 

 나의 과거를 타인의 삶에 비해 ‘유독’ 고통스러웠던 순간으로 만들면 얻게 되는 성취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1. 타인의 성취를 그저 운칠기삼에 불과한 정도로 만들 수 있다.
2. 잘 풀리지 않고 있는 현재의 삶에 거대한 면죄부를 안겨줄 수 있다.
3. 생각보다 인생이 잘 풀려갈 때 사람들의 시기질투로부터 보다 안전할 수 있다.


  행복이란 것에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수치가 없는 것처럼, 불행도 이와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우리네 인생에 행복과 불행만큼이나 상대적인 개념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다. 전교 1등도 건물 옥상에 올라가고,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대기업 임원이나 정치권의 중직 인사들이 검찰 조사 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현대인을 채우고 있는 자존감은 어쩌면 무척이나 연약한 기반 위에 겨우 그 존재를 붙이고 서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본인을 조금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리고 그런 식으로 위태로운 자존감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탠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닌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마약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이를 전혀 권면하지 않고 싶은 이유는, 마약과 닮은 점이 참 많기 때문이다. 이런 요식 행위는 결국 겨우 순간만 구제해줄 뿐이다. 한정된 과거는 소비하면 할수록 공허해져버린 내면을 더욱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어서 내가 살아가야 할 현재는 매 초, 매 순간 나를 부지런히도 껴안는다. 내게 필요한 것이 더 나아진 미래라면 더욱이 이를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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