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것은 안되고,
꼭 김치찌개여야만 하는 날이 있다.
비가 내릴 듯 말듯 하늘이 영 우중충하거나, 오히려 너무 더워서 고단한 날. 혹은 쌀쌀 맞은 가을 찬바람에 뼈까지 으슬으슬한 날. 눈이 너무 내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깜깜한 금요일 겨울밤까지.
김치찌개를 먹어야만 하는 날은 어쩌면 날씨보다는 마음 속에 있는 셈이었다.
보글보글보다는 부글부글하며 끓어대는 빨간색의 용암은 한주 간의 애환을 제 속으로 꼬깃 꼬깃 욱여내며 마치 없었던 것처럼 만든다.
여느 김치찌개 식당을 가더라도 찌개를 끓여내는 냄비들은 저마다 어딘가 구겨져있고 찌그러져 있기 마련이다. 김치찌개 집을 찾은 손님들은 마치 찌개의 깊은 맛이 그곳에서부터 우려져 나오기라도 하듯 저마다의 눈빛을 냄비에 조용히 녹여낸다.
모름지기 김치찌개의 맛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 돼지고기의 지분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김치찌개에는 보통 돼지의 앞다리살이나 목살을 사용하게 되는데, 김치나 두부와는 달리 특유의 질긴 식감은 혹여라도 김치찌개가 질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침내 돼지고기의 구수한 향이 찌개 전체에 고루 흩어지게 될 때라야, 비로소 김치찌개를 주문한 기분이 난다.
엄마의 김치찌개
엄마하면 으레 김치찌개 생각이 나는데, 김치찌개를 떠올려도 엄마 생각이 난다.
스물한 살 무렵에 처음으로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조악한 김치찌개를 끓여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십오 년 전 엄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가난한 대학생 신분에 너무 싼 돼지고기를 썼던 나의 김치찌개는 엄마표 김치를 잔뜩 썰어 넣었음에도 전혀 좋은 맛을 내지 못했다.
내 사춘기 무렵에 우리집은 경제적으로 무척이나 힘든 시기를 보냈다. 흔하디 흔한 치킨이나 피자도 나에겐 그리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철없이 보채기만하는 사춘기 아들에게 무엇을 얼마나 줘야할지, 고등학교까지만 나오신 우리 엄마에겐 매일이 수학 공부이고 수학 숙제였을 것이었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아들이 먹을 찌개에 만큼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좋은 고기를 쓰셨다. 좋은 고기를 써야만 비로소 나게 되는 깊은 김치찌개 맛이, 나의 추억의 편린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엄마가 무엇을 포기하고 아끼며 그 김치찌개를 만드셨을까. 벌써 나이가 서른이 다되어가는데, 나는 아직도 엄마가 만든 김치찌개 맛 하나도 못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