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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Sep 12. 2021

엄마 괴롭히기 수업

그게 워킹맘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지 몰랐다. 아니, 알아서 더 그랬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햇수로 3년 만에 엄마를 봤다. 차를 폐차한 엄마가 무모한 부탁을 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할 거면 연락하지 마."라고 내가 말한 게 1년 전. 엄마는 전보단 작지만 처음 보는 중형 차를 끌고 서울의 한 도로변에서 나를 기다렸다. 서로 어디까지 왔는지 전화로 계속 확인하고 갓길 주차 중인 차로 뛰어든 뒤 앞 좌석에 올라탔다. 차 문을 열 때 잠시 남의 차일까 봐 머뭇거리는 찰나의 순간까지 십수 년 전 학원 라이딩 때 같았다.


  엄마는 딱 3년만치 나이 들어 있었다. 만나기 전엔 기울어진 경제 사정이 빛나던 외모에 그늘을 만들까 걱정되기도 했다. 텃밭에서 햇볕에 장기간 노출된 탓에 눈가 주름 쪽 음영이 짙어진 것 말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특히 존재감을 잃지 않은 두툼한 입술과 보그 편집장 같은 많은 머리숱은 여전했다. 노화에 스러지지 않는 타고난 아웃풋이 가끔은 무섭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97세, 외할머니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90세를 넘겼다. 엄마도 별일 없이 백 살까지 살까? 홈 비디오 안의 어른들은 모두 청년과 중년인데 외할머니만 지난 세기에서도 노인이었다. 동시에 '긴 병 앞에 효자 없다'라며 몰래 나와 담배를 피우던 엄마의 옆모습도 기억을 스쳤다. 


  엄마의 얼굴을 뜯어보면 나와 다르게 생겼단 경외만 되돌아왔다. 외가의 유전자 보존을 위해 둘째를 낳아야 할 정도로 우리는 닮지 않았다. 내가 엄마에게 이어받은 게 있다면 눈썹. 왼쪽 눈썹의 눈썹산이 삐뚤게 위로 치켜 올라간 부분만을 엄마에게 받았다. 일요일 밤이면 화장실의 주황색 알전구 빛 아래서 그는 삐뚠 왼쪽 눈썹산을 눈썹칼로 슥슥 잘랐다. 어느 날 내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던 그는 신기한 발견을 한 듯 뭐라 뱉었다. "너도 엄마 눈썹이네. 크면 왼쪽 눈썹은 정리해야겠다." 귀찮은 가족력을 지워버리려는 듯 엄마는 내 왼쪽 눈썹 끝을 손으로 비볐다. 이왕이면 탤런트 정선경을 닮은 쌍꺼풀진 처진 눈이나 근육 없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종아리를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출생과 동시에 '씨도둑은 없다'란 관용어를 증명했다. 나는 오롯이 친탁했다.


Photo by Les Anderson on Unsplash


  학교에서 분수의 덧셈과 뺄셈을 배울 때쯤 나는 엄마를 괴롭히는 방법도 착실히 학습했다. 밀레니엄이 밝을 때쯤 그는 상호 뒤에 '중기'가 붙는 중장비 대여 업체의 홍일점 경리로 취직했다. 온종일 거실에서 쭈그리고 앉아 부업 물품들을 꿰던 때에 비해 사람도 많이 만나고 지갑도 여유가 생겼다. 그는 생기가 돌고 즐거워 보였다.  엄마의 취뽀는 주말이면 아웃렛에 가서 FILA나 NIKE 로고가 붙은 흰 양말을 사 오는 경제적 여유를 가계에 부여했다. 동시에 내게 천부인권 같은 한 권리를 부여했다. 티비나 교과서에서 '연신 여성의 맞벌이로 증가하는 가정해체'를 익히고 자란 나는 일자리를 구한 엄마에게 서운해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 


  엄마가 일하던 업체들은 중장비를 세워둬야 해서 외딴 도로변의 공터 옆에 덩그러니 있었다. 집 열쇠를 챙기는 걸 까먹은 날엔 학교에서 인도도 없는 차도 갓길을 20분쯤 걸어 'XX중기'를 찾아갔다. 핸드폰도 없던 시기라 무작정 방문해서 컨테이너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숨겨진 사생아가 찾아온 것처럼 엄마는 질색하며 일어나 열쇠를 건네줬다. 열흘에 한 번은 그랬으니 칠칠치 못하다며 신경질이 날만도 했다. 조심해서 얼른 집에 가. 컨테이너 문이 닫혔다. 닫힌 문 안에선 직원들에게 예고 없는 방문을 해명을 하는 난처함이 들렸다.  


  열쇠를 똑바로 챙긴 날에도 동생과 싸우거나 동생에게 삐지면 엄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그대로 일러바쳤다. 하루에도 몇 번을 그랬다. 그 끝엔 "엄마 언제 와?"라고 꼭 물었다. 그 당시엔 그게 워킹맘의 가슴에 죄책감을 심어주는 일인지도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으니 타격을 받으라고 계속 그랬던 걸 수도 있다. 나는 숙제만큼 꾸준히 전화와 회사 방문을 반복했다.  


  그때쯤 안방에선 '패션쇼'가 열렸다. 후식 과일까지 먹고 '보고 또 보고' 같은 드라마도 끝난 시간대면 엄마는 아빠 왈 '패션쇼'라 부르는 내일의 코디 고르기를 했다. 장롱문을 활짝 열어놓고 계절에 맞는 옷들을 꺼내놓고 어떤 치마에 어떤 상의를 입을지 심혈을 기울여 코디를 정했다. 어떤 밤엔 루주도 맨얼굴에 새로 발랐다. 나와 동생은 패션쇼의 관객이기도 했고 심사위원이기도, 백스테이지 스텝이기도 했다. 그 옷은 너무 야하다거나 조금 통통해 보인다거나 어디서 주워 담은 평들을 뽑아냈다. 당시엔 속담이나 유행어를 배우고 그게 어른을 놀릴 수 있는 거라면 엄마를 향해 썼다. 엄마가 민망해서 웃으면 나는 영특한 아이라도 된 것처럼 뿌듯하게 우쭐댔다. 이러다가도 엄마가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 원피스의 지퍼를 허리에서 목덜미 뒤까지 올려줬다. 


  패션쇼는 주로 아빠가 고스톱 치러 나가거나 밤새 술을 마시러 집을 비운 날에 벌어졌다. 아빠는 아내가 남자들이 많은 직장에서 굳이 치장을 한다며 홈 패션쇼를 못마땅해했다. 개성표현으로서의 패션의 성격은 애써 무시했다. 매번 '자기치장과 지성의 반비례'를 주창했다. "너네 엄마 봐봐. 너네 엄마는 꾸미는 것만 좋아해. 사람이 지식을 채워야지. 꾸미는 것만 좋아하면…" 이하 왈왈. 아빠는 스포츠머리에 오늘 입은 옷을 내일 입지 않는다 정도의 패션 규칙만 가졌다. 아빠에게 부재한 자기치장을 보완하는 넘치는 지성이 있을 린 만무했다. 친탁한 탓에 영민하지 않던 나 역시 '공부를 잘하려면 꾸미는 데 관심을 두면 안 되고, 특히 기혼여성이 꾸미는 건 해악한 행위'라는 이상한 결론에 세뇌당했다. 나는 아빠를 따라 성실하게 엄마를 비난했다. 내가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그 근저엔 언젠가 불행이 터질 것 같단 공포가 있었다. 그 일의 복선을 찾자면 이 패션쇼와 기혼여성 취직일 거란 불안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건 아빠 혼자만의 헛된 생각이었다. 잠긴 안방 문이라도 소리는 새서 나는 여과 없이 일방적인 주장을 듣고 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잘못된 귀인이 내 자발적인 생각이자 주어진 내 운명인 줄로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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