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부터는 태평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다가 매우 고요했고, 멀미도 며칠을 제외하곤 거의 하지 않았다. 식사와 책 읽기, 드라마 시청이나 영화 감상이 하루 일과의 다였지만, 해 질 녘 갑판에서 보는 저녁노을은 매일 봐도 어찌나 새롭고 아름답던지, 지루한 하루 중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다. 남위 20도부터는 꽤 더웠는데, 내 방이 에어컨이 약해서 얼음물을 껴안고 지냈다. 바다 색깔이 정말정말 아름다웠다. 바다의 이데아를 봤다고나 할까.
돌고래도 두어번 봤는데, 노을빛을 등지고 서너 마리가 수면 위로 점프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비록 지느러미만 봤고 그것마저 영상으로 남기지도 못했지만.. 근데 사실 내가 등에서 분수를 푸솨솩 내뿜는 혹등고래를 봤다고, 하지만 바로 들어가서 사진은 못찍었다고 해도 여러분은 믿는 수밖에 없을거다. 바다 위를 날아다녀 처음에는 새인 줄 알았던 날치를 보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날씨 좋은 날 밤에는 수많은 별도 보고, 육지 근처에서는 밤새워 기다렸다가 일출을 봤던 추억도 있다.
쇄빙선을 타고 비구름을 지나던 일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바다에서 비 맞은 게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배 한쪽에는 비가 오고 다른 쪽에는 비가 오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까. ‘대체 비는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 걸까. 그 경계에 서보면 참 재미있겠다. 몸 반쪽은 젖고 나머지 반쪽은 그대로고.’ 어릴 적부터 이런 생각을 해오던 나에게 저 멀리 보이는 비구름과 그쪽을 향해 가는 배는 마침내 꿈을 실현해줄 기회처럼 보였다. 비구름에 가까워지자 배 앞쪽에 비가 내리더니, 잠시 후에는 배 오른쪽만 비에 젖고 통로 건너 반대편에는 거의 비에 젖지 않았다. 비록 몸 반 젖기 실험은 하지 못했고 몇 분 후에는 왼편에도 비가 왔지만, 내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평생 비를 볼 때면 그때가 종종 생각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쇄빙선에서 기억나는 일화 한 가지.
“날씨가 좋으면 12마일까지도 보입니다.”
“앗! 바다라 훨씬 멀리까지 보일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멀리 가면 배가 수평선 밑으로 사라지니까요..”
“아핳 맞네요 지구가 둥글다는걸 깜빡했네요.”
지구가 둥글다는 건 머릿속으론 알지만 적용할 상황이 자주 없어서 현실에선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 그냥 내가 모자라서 그런걸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