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굉장히 감명 깊게 봤다. 그럼에도 발레를 배워보겠느냐는 엄마의 제안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첫마디는 “남자가 무슨 발레예요?”
당시 엄마는 60세의 나이에 난생처음으로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셨다. 그 몇 달 전에는 피아노도 시작하셨는데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엄마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60세에 직장을 다니며 피아노와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는 여성이라니! 우리 엄마가 얼마나 멋지고 존경스럽던지. 그러던 엄마가 한 달 정도 배우신 후에 너무 좋고 재밌다며 나에게도 권하신 거였다. 처음엔 거절했으나 엄마의 계속된 권유와 ‘지금 아니면 평생 엄마랑 함께 뭔가를 배울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에 배우기로 했다. 그렇게 군대 말년 휴가부터 시작된 발레는, 반년쯤 후에 엄마가 먼저 그만두시고도 나 혼자 몇 개월을 더 배우며 1년을 꼬박 나와 함께했다.
첫 발레 수업에서 나 말고도 남자가 있다는 걸 알고는 놀라움과 안도, 아쉬움이 교차했다. 놀라움은 즉각적인 반응이었고, 나만 남자가 아닌 게 다행이라 안도했으며, 남자는 나만 있어야 되는데 아니라서 아쉬웠다. 관심이 필요했다기보다는 기왕 큰맘 먹고 하는 발레인데 ‘나는 발레하는 남자닷!’과 같은 특별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게 그건가? 다른 남자 분은 공군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는 분이라는 걸 알고는 왠지 더 놀랍게 보였는데, 그분 발레 슈즈는 남색이었고 난 분홍색이었으니 아무튼 내가 이겼다. 선생님이 남자는 보통 짙은 색을 신는다고 하셨지만 결국 ‘발레는 분홍이지’라는 내 고집을 꺾지 못하셨다.
1년간 총 두 곳의 발레 연습실을 다녔는데, 둘의 구조는 거의 동일했다. 직사각형 방의 긴 벽면 중 하나는 전체가 거울로 되어 있으며 한쪽 구석에는 손으로 잡거나 다리를 올려놓는 용도의 연습용 바(barre)가 있고 음향 시설이 있다. 수업 방식 또한 처음에는 음악을 따라 스트레칭을 한 후, 진도에 맞 춰 배운 동작을 복습하고 새로운 동작을 배우는 순서로 비슷했다.
거울 앞에 서서 음악과 선생님의 지도에 맞춰 동작을 따라하다 보면 두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성취감과 자괴감. 발레 공연에서 보던 손짓과 몸짓을 비슷하게나마 따라할 수 있고, 남이 볼 땐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거울로 보기엔 괜찮은 자세가 나온다. ‘와, 이게 되네?’ 싶은 생각에 놀라우면서도 뿌듯하다. 하지만 동시에 거울을 볼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 내 기준에 남자 몸의 이데아는 발레리노의 몸이다. 외형에 대한 묘사보다는 당장 구글에 ‘발레 축제 포스터’라고 검색해서 남자가 나오는 사진을 아무거나 클릭해 보는 게 이해가 빠를 것이다. 게다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정보도 발레리노의 훈련 과정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근력과 유연성. 유연성이야 발레니까 당연하지만 근력은 갸우뚱했는데 발레리노는 웨이트 트레이닝이 필수라고 한다. 발레리나를 한 팔로 번쩍 드는 것부터 공중에서 발바닥을 몇 번씩 교차할 만큼 높이 점프하려면 근력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대단한데 둘 다 있다니. 내겐 둘 다 없는 대신 옆구리 살이 있으니 거울을 볼 때마다 자괴감이 들 수밖에. 그럼에도 적당히 가려지는 옷을 입고 적당히 자세가 나오기에 행복하게 발레를 배우러 다닌 1년이었다.
발레 축제 포스터.
이렇게 행복하고, 근력과 유연성을 기를 수 있는 활동이기에 난 발레를 모두에게 추천한다. 특히 나중에 아내와 합의해 자녀를 키우게 된다면 성별을 막론하고 발레를 권하고 싶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사용하기에 ‘여기에도 근육이 존재했어?’ 하며 놀란 적이 많고, 몸의 중심부터 건강해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허리와 목의 통증이 많이 줄어들기도 했다. 또한 하체를 구석구석 움직이기에 과하지 않은 선에서는 나이가 들어서도 필요한 운동 같다. 아마 평생 운동 두 가지만 하라고 하면 발레와 관절에 좋은 수영을 꼽지 않을까(프로 수준에서는 다들 부상을 달고 사니 취미 수준에서).
발레를 배우며 달라진 점은 발레 공연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생 때 외국에서 유명 발레단이 왔다고 해서 당시 거금 3만 원을 주고 관람했는데, 중간에 숙면을 취한 이후 발레 공연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레 선생님이 공연을 추천해주셨고, 예술의 전당에서 청소년 할인을 받으면 1만 원에 S석에 앉을 수 있었기에 보러 갔는데 너무 행복했다. 멀리서 볼 땐 손짓 발짓만 보였는데 S석에선 표정까지 보이니(안타깝게도 숨결까지 느껴지진 않았다), 그 어려운 동작을 하면서도 몸짓 하나하나에 감정을 싣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어려운 동작이 얼마나 어려운지 발레를 배워서 조금이나마 알기에 더욱 감탄이 나왔다. 저 점프와 발동작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하고 발목을 삐어야 했을까.
그리고 이때부터 취미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대학생 때 뭐든지 최대한 많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지고, 사람들을 만날 때 친해지기도 쉬운 건 덤이다. 학교에서 팀 프로젝트를 할 때 무용과인 친구가 있었는데 발레 이야기를 하니 엄청 놀라며 상대적으로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나만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취미를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가 됐든 배우는 것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개인적으론 대학에서 수강했던 소프트볼과 스키 같은 교양 스포츠 강의가 어떤 분야의 맛을 보기엔 최적인 것 같다. 학점도 챙기고 돈도 적게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