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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뚜 Feb 25. 2022

언니

엑스틴엄마 독립기

어린 시절 우리집은 하루에 버스가 5번들어오는 산촌이었다.5일장이 서는 면에서도 고개5개쯤 넘어야되는 곳이었다.비포장길을 털레털레 걸어가다보면 나오는 그런 마을.제대로 된 슈퍼도 없어서 이에 불편을 느낀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새마을가게'라는 걸 운영했다.간식이래야 흑설탕을 물에 타 마시는게 고작이었던 나는 동네친구들에게 이번주는 누구네집이 새마을가게더라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엄마를 졸라 초코파이와 과자 한두개를 사오곤 했다.어렵게 구한 과자는 그 가치때문에 꿀맛으로 느껴졌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노는 게 아니면 우리집 누렁이랑 노닥거리는 일이 대부분이다.흑백티비가 있었으나 그당시엔 저녁에만 나왔다.작은언니를 따라 마실을 다니기도 했었는데 취업과 학업을 한번에 해결해주는 서울 야간고등학교큰언니따라 작은언니도 떠난 후로는 그럴 일도 없어졌다.


시골사는 나의 유일한 즐거움은 방학동안 언니들에게 가는것이었다.도시로 달려가 새로운 것들을 볼 수 있으니말이다.언니들은 가리봉동쪽에서 공장을 다녔다.연탄방에 딸린 작은 부엌하나.공용화장실.거기에서 공순이였던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자취를 했다.

여름과 겨울방학이면 엄마와 서울행고속버스를 탔다.삶은 계란을 먹고 차멀미 몇번 하다보면 서울이었다.엄마가 시골로 내려가고서도 나는 방학내내 언니들과 지냈다.낮에 아무도 없으니 언니들이 미리해놓은 반찬으로 혼자 끼니를 때웠고 멍때리기,천장보고 누워있기,언니남친이 쓴 연애편지 몰래읽기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언니들이 퇴근하면 양념치킨과 바나나등을 사올테니 무료한 낮시간을 어떻게든 버티면되었다.

평일에 혼자있는 나를 데리고 언니들은 주말엔 동물원에 가기도,지금은 금싸라기땅이 된 여의도광장 롤라스케이장을 가기도 했다.내가 신문물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나는 유독 작은언니를 좋아하고 따랐다.큰언니가 못해주는 것도 아니었다.작은언니와 어린시절부터 보낸 시간이 더 많았고, 사춘기에 접어든 막내동생(나)의 가슴을 덥썩 만지려드는 큰언니의 짖굳은 장난이 싫었다.자린고비같은 절약도 촌스럽게 느껴졌다.

언니들은 어린 나이에 힘들게 번 돈으로 간혹 시계나 옷을 보내왔다.작은언니가 주로 보냈는데 편지도 함께였다.언니의 편지는 오매불망 나의 작은 세계였고 고달픈 내 어린시절의 위로였다.그 편지들은 시골집을 급하게 정리하면서 나의 모든 유년시절물건과  함께 사라졌다.편지속 언니는 한없이 다정했고 나는 그런 언니의 귀여운 동생이었다.언니에게 대들고 싸우는 일은 나에게 가당치않은 일이었다.언니는 무던한 큰언니에 비해 신경질을 종종 내었는데 그 심기를 거스르지않고 언니와 완벽한 자매관계의 틀을 늘 유지하고 싶었다.그것은 나중에 성인이 된 나에게 심적인 부담이 되었고 언니가 간혹 부리는 짜증에 대거리도 못하고 듣기만하는 내가 답답해 그 고착된 관계를 깨고 싶었다.

드라마속 자매들이 툭하면 머리채잡고 싸우지만 성장해서는 더할 나위없는 든든한 서로의 편이 되는 과정이 부러웠다.나도 언니와 드라마속의 그런 찐 자매가 되고싶었다.겉으로보기엔 더할나위없이 그래보였지만 하고 싶은 말도 편히 못하는 허물없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대학을 들어가고 싶었다.남편이 병으로 죽고 생활비나올 곳없는 늙은 여자의 자식인 내처지를 생각하면 언감생심 욕심을 내면 안되는 거였다.그래도 나보다 공부못한 학교친구들이 하나둘 입학소식을 전하는 상황에서 미치도록 가고 싶었다.이대로 포기하면 영원한 사회의 낙오자로 남을 것 같았고(사실은 그렇지않은데 우물안개구리같은 사고에 갇혀서 그랬던 거 같다) 작은 사무실을 다니다 그저그런 남자만나 그저그런 인생을 살아갈 것만 같았다.

돈인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막막했는데 작은언니가 해준다고 했다.당시 언니는 결혼한 큰언니집에 같이 살고있었고 사귀던 남자친구(지금의 형부)가 있었다.작은언니만 믿고 있던 어느날 큰언니는 시골서 올라와 있던 나에게 대학을 포기하라고 했다.작은언니가 대주기로 했던 등록금은 결혼자금이라면서.그걸 널 주면 걔는 어쩌겠니.생활력없는 엄마도 싫었고 포기하라고만 하는 큰언니도 싫었다.등록금준다더니 더이상 아무 말도 없는 작은언니도 실망스러웠다.눈물콧물까지 다 짜내고 자포자기했다가 대학등록마감 하루를 남겨두고 큰형부에게 전화해 사정했다.한번만 등록금을 도와주시면 모든 건 다 내가 해내겠다고.그렇게 큰 형부가 도와주어 나는 무사히 대학등록을 마치게되었다.등록금이 애들장난이냐며 반대했던 큰언니도 포기했다.일단 들어가기만하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거라고 나는 생각했다.그 뒤의 고생길을 미리 볼 능력이 그당시 나에게는 없었기에.방얻을 돈이 없어 엄마는 생면부지 친척집에 쌀한가마니를 가끔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나를 맡겼다.

작은언니는 나를 데리고 지하상가에 가 옷이며 이것저것 사주었다.그리고.....그해 언니는 결혼을 했다.사탕부케를 들고 간 내 눈에 눈물로 번진 마스카라를 연신 닦아내던 언니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든든했던 언니의 지원은 이후로 조금씩 옅어졌다.그러다 언니에게 부탁(어떤 부탁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돈부탁이거나 그리로 가겠다는 얘기아니었을까)을 했었고 언니는 거절했다.처음으로 작은언니로부터 받은 거절은 나를 참 외롭게 했다.언니가 출가외인이 되었음을 받아들여야함을 깨달은 날이기도하다.


그래도 여전히 대도시에서 경제적으로,심적으로 지쳐있던 나에게 비빌 언덕은 작은언니뿐이었다.어쩌다 방학이 되면 작은언니집에 가서 따뜻한 밥을 먹고오기도 했었으니.큰언니는 순탄치않은 결혼생활에 지쳐 나에게 신경쓰지않았고, 가방끈짧고 생활력없는 엄마 희씨는 창피와 원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언니집에 갈때는 보잘것없는 친정식구라고 혹여나 작은형부가 뭐라고 할까싶어 늘 지레 기죽고 위축이 되었다.다행히 형부는 한번도 나에게 눈치를 주지않았다.용돈도 더러 챙겨주었다.


그런 언니와 더 돈독해진건 내가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면서부터였다.가난한 내 처지에선 성공한 취업이었기에 나의 '기'도 이때부터 조금씩 펴졌다.지인들에게 역경극복한 나의 취업기를 자랑한다는 언니와 형부앞에서 으쓱해졌고 늘 받기만 했던 내가 언니가족들에게 인심도 쓸수 있게 되었다.언니와의 관계는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를 벗어나면서 내가 바라던 대로 심적부담감을 벗고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갔다.언니에게 산후조리도 받았고 돈을 빌려주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같은 도시에 사니 종종 만나 얘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먹는 날들이 이어졌다.언니가 다른 도시로 이사가서도 언니와 나는 서로의 유일한 대나무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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