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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뚜 Feb 25. 2022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엑스틴엄마 독립기

면에 위치한 시골고등학교에 다니게 된 나는 더 산골인 우리 집에 들어가는 버스가 일찍 끊기므로 통학하기가 어려웠다. 야간자습이 있었고 동네 언니 오빠들도 진학하고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었다. 친구들과 셋이서 처음 자취를 시작했다. 지금 나이의 내가 볼 때 고등학교 1학년은 애기인데 어찌 살림을 꾸릴 생각을 했었는지...그때의 나는 스스로 어리다는 생각이 없었다.자취하던 친구들과는 평일에 하교 이후 사과 서리를 하고 저수지에 놀러 가 키조개잡고 다른 자취방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떨며 재미있게 보냈다.시험이 있기 전 주말이 아니면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에 덜거덕거리는 반찬통을 들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집에는 엄마밖에 없었기에 일주일 만에 집에 가는 게 그다지 설레는 느낌은 아니었다.다른 형제가 있거나 5일 장터 소재지에 사는 아이들은 슈퍼도 있고 문방구도 있어 제법 놀거리들이 있었다.각 집을 전전하던 새마을가게마저 없어져버린 우리 동네는 내 또래 아이들이 진학해 읍내로 썰물처럼 빠져나가 휑한 느낌이었다.벅적거리던 곳을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도시인들이 힐링하러 떠나는 나들이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버스에서 흙먼지 나는 길로 내려서면 갑갑함이 몰려왔다.바람빠진 풍선마냥 기운이 빠졌다.


엄마도 그 당시 공장을 다니기 시작해 우리 집은 일주일간 비워져 있었다가 주말에만 사람의 온기가 돌았다.아버지생전 우리집새로 짓는데 일꾼들 밥해대느라 허리가 부러졌다고 늘 한탄하던 엄마가 공장에 취직한 게 신기했다.그 덕인지 엄마는 그전보다 조금 더 용돈을 쥐어주었다.


집에 가서 할 거라곤 잠깐 엄마에게 인사하고 티브이를 보는 것 외엔 없었다.앞뒤산으로 둘러싸인 집이다 보니 밤이면 여자 둘이 있는 게 무섭기까지 했다.저녁이나 밤에 꼭 한두 번은 대문 밖을 나서야 했는데 변소에 가는 일이었다.우리집 변소는 하필 대문 밖으로 나가야했다.집에 바로 붙어있었는데 문을 굳이 밖으로 낸 것은 아마도 변소의 음험한 기운이 집안으로 스며들지 않게 등지고 문을 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곤하게 입 벌리고 자는 엄마를 깨우면 평소와는 달리 별 짜증 없이 따라나섰다.대문을 나가면서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은 지붕위로 쏟아져 내릴 것처럼 열심히 빛을 뿜어댔다.


그날도 헛헛한 집에 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전화가 울렸다. 술 취한 남자의 목소리였다.엄마를 찾으며 바꿔달라고 했다.밖에 있던 엄마를 바꿔준 후 나는 다시 티브이 삼매경에 빠졌다.엄마는 누구냐고 묻는 나에게 다니는 공장의 직원이라고 했다.늙은 남자가 늙은 우리 엄마에게 연애감정을 느낀 것인가.


전화는 이후 주말마다 여러 번 이어졌다.횡설수설하며 엄마를 찾는 남자가 싫었다.그러다 말겠지 싶었다. 이후 나는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해 도시로 떠났다.

대학 입학 후 처음 맞는 추석명절, 엄마는 어느 시골 주소를 알려주었다.엄마의 친척이 사는 동네라고 했다.시골집이 무섭다고 했던 엄마가 드디어 친척집에 얹혀살고 있는 건가.찾아간 곳은 엄마의 친척이 살고 있는 동네, 어느 홀아비의 집이었다.그 집에서 부엌일을 하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한마디 언질도 없이 그곳에서 엄마는 남자와 살고 있었다.엄마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이렇게저렇게 돼서 여기에 살게 되었다는 변명도 없었다.반나절만에 나는 상황파악이 되었다.남자의 다 큰 자식들도 있었기에 이말저말할 상황이 아니었다.거기서 엄마를 데리고 나올 수도 없었고 뿌리치고 혼자 나와버릴 용기도 20살짜리에겐 없었다.그저 말없이 밥 나르는 걸 거들고 남자의 술주정을 같이 들었다.남자는 나에게 힘든 집안상황에서 삐뚤어지지 않고 잘 자랐다고 했다.더불어 나는 2학기 등록금을 남자가 일정 부분 도와준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필 동거하는 남자가 끼니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니.본성은 나쁘지 않은 사람인 듯 했다.그 자식들도 나쁘지않게 대해줬다.그러나 낯선 시골집 방 한구석에서 잠을 청하며 내가 왜 이곳에 와있게 된 건지 기가 막히고 창피했으며 미친 듯이 화가 났다.

이후 난 그곳에 발길을 끊었다.다신 걸음하고 싶지않았다.내가 전한 소식에 언니들도 기막혀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듯 했다.돈 한 푼 못 버는 엄마가 사는 방법이 그거외엔 없던 건지, 늙어서 무슨 시집을 간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글자도 모르고 허리디스크로 돈 못 버는 무능한 엄마가 끝도 없이 미웠다.


1~2년이 지났을까.별 연락없던 큰언니가 전화를 했다. 큰 형부가 엄마와 같이 살 방을 얻어줄 테니 같이 살라고 했단다. 도회지에 사는 아줌마들과는 다르게 화장할 줄도 모르고 몸빼를 외출복으로 입으며 글자도 몰라 전적으로 나에게 의지해야 하는 엄마를 떠맡는 게 내키지 않았다. 이대로 쭈욱 엄마와 같이 살게 될지 모른다는 암울한 생각이 앞섰다.나의 가장 우울한 본진인 엄마를 껴안고 그렇게 내 20대를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단번에 거절했다.

이후 큰 형부가 나를 '나쁜 년'으로 지칭했다는 말을 들었다.난 엄마를 내팽개친 나쁜 년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비난을 한번도 받아본 적 없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그 한마디는 가시가 되어 박혔다.착한 행동을 하다가도 '난 엄마를 외면한 나쁜 년인데 남에게 베푸는 이중성이라니'하탄식이 흘렀다.


그 가시가 뽑혀서 괜찮다고,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그랬던 너는,엄마를 싫어하는 마음을 품고 산 너는 나쁜 년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기까지.......꽤 많은 시간을 지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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